「일러스트 에세이 작가 최하영, 신간 출간 기념 북 콘서트」
뜨거운 공기가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만 같던 여름의 어느 날, 북 콘서트 안내 포스터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게 된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우연의 결과였다. 난 퇴근시간의 북적거리는 종각역 4번 출구 앞에서 오랜만에 함께 술 한 잔 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친구는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돼서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내게 보냈다. 마냥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엔 너무나 후덥지근한 날씨였기에 나는 더위나 피해볼 생각으로 인근의 대형서점으로 이동했고, 서점의 정문 옆에 있는 게시판 앞에 섰을 때 그 포스터가 내 눈에 띈 것이었다.
포스터에서 처음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을 땐 내가 알고 있는 최하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동명이인의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포스터 하단에 있는 작가의 사진을 보고는 그녀가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0대 중반이 된 사진 속의 그녀는 전체적으로 예전의 모습과는 살짝 달라진 듯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눈, 코, 입 모두 예전 하영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작가가 되었구나. 나는 그 포스터를 봤을 때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고, 그녀가 자신의 꿈을 이룬 것에 내심 기쁘기도 했다. 작가가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목표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을 그녀가 새삼 대견스러웠다. 그런 그녀에 비해 아직까지도 원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녀는 몇 년 전에 데뷔작을 내고 등단했으며,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에세이를 연재하다가 이번에 두 번째 작품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기사를 검색해 보니 그녀는 이미 일러스트 에세이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쉽게 그녀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와 연락을 끊었던 지난 10여 년 동안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피했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의 이십 대 시기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은 잠시 스쳐 지나갔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나는 항상 따뜻하면서도 애틋하고, 쓸쓸하면서도 쓰라린 안타까운 여운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바보같이 다시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예전의 그 어리석었던 실수를 다시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어도 애써 피하고 멀리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이름을 우연히 본 후,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이제는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로서 아무런 감정 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지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되어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해 주러 나타난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녀도 나를 보면 반가워할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다면 예전의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을 거야. 벌서 10년도 넘게 지난 일이잖아.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져 오는 느낌을 애써 모른 척하며 나는 아무런 특별한 감정 없이 그녀를 만나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북 콘서트는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 4시였다. 토요일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로 특별한 스케줄 없는 주말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스마트폰의 일정관리 앱을 열고 토요일 오후 4시에 ‘최하영 북 콘서트’를 입력했다. 화면에 텍스트로 표시된 그녀의 이름과 날짜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와 나는 6학년 때 같은 반으로 지낸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우리는 10년이 훌쩍 흐른 뒤 20대 중반이 된 4월의 어느 날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서로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 외모와 크게 변하지 않았었다. 하얀 피부에 눈과 입이 크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그녀는 반에서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아이였다. 이제 20대가 된 그녀는 성숙한 느낌이 있었지만 분명 그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아직까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이후 동네에서 종종 만나면서 함께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이제 막 복학을 한 나하고는 달리 그녀는 이미 취업을 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광고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아니면 함께 길을 걷다가 텔레비전에서 그녀가 작업한 광고가 나오면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때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뿌듯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난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야. 뭔가 다른 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도전해 보고 싶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취업은커녕 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한참 남은 나로서는 이미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있는 그녀가 부럽기만 했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와 자주 만나게 되면서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6학년 때도 그녀를 좋아했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녀를 좋아했었다. 그녀는 반에서 가장 예쁘고 인기가 많은 아이였고,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에게 그러한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녀에게 끌리는 것은 그러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 특별한 감정으로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과 말투, 행동에는 분명 독특한 매력이 있었고, 흔히들 생기라고 표현하는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같이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녀가 발산하는 그러한 기운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우리는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우리의 대화는 종종 이를 주제로 하곤 했고, 그럴 때면 항상 둘 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대화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점점 주체할 수 없이 그녀에게 끌렸다. 만약 우리가 사귀게 된다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그녀가 현재로서는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를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나의 마음을 숨긴 채 우선 동네 친구로만 지내기로 했다.
내가 상우를 그녀와의 만남에 데리고 나온 건 이맘때, 즉 나와 그녀가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내가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감정을 가지기 시작할 때였다. 상우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고, 우리는 서로 죽이 잘 맞아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사이였다. 나한테 그녀 얘기를 들은 상우는 그녀에 대해 궁금해했고, 나도 상우가 함께 하면 조금 더 분위기가 재밌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가진 이후로는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나도 모르게 점점 어색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고 상우를 만남에 불러내었다.
상우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나에 비해 외향적인 성격이었고 말주변도 뛰어났다. 넉살도 좋아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유머러스하게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타입이었고, 그래서 그녀도 그런 상우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친해지는 것 같았고, 어느새 우리 셋은 오래 만난 친구들처럼 편안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렇게 셋이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나에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상우는 문화예술 분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셋이 모이면 대화는 그 외의 다른 주제에 대한 것들이 되었다. 그녀와 둘이서 나누던 흥미로운 대화들은 어쩔 수 없이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어느 날 나는 상우와 집 근처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중 그녀에 대한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예전부터 서로의 연애 고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고 조언을 해주곤 했었기에 이러한 대화가 어색하지 않았다. 상우는 내 말을 듣고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가 분명 하영이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었어.”
“그래? 티 났냐?”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캔맥주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티 났지. 누가 봐도 알았을 걸? 하영이를 보는 네 눈이 그냥 하트였어, 하트.”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나는 상우에게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데 고백을 해도 괜찮을지 확신이 안 든다고 얘기했다. 그녀가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고,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상우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중요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우선 지금 당장 고백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같이 있을 때 얘기하는 거나 태도를 보면 내가 봐도 하영이가 딱히 너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 조금 더 기다리면서 하영이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확신이 들 때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지금 고백했다가 사이만 어색해진다니까.”
맞는 말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상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대답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바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연애에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만약 지금 당장 고백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생길 것 같다는 모순된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상우는 이러한 내 생각을 듣더니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나에게 말했다.
“아니라니까. 야, 내가 얼마 전에 하영이와 만나서 술 한 잔 하며 얘기를 했었는데.”
순간 상우의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와 만나서 술을 마셨다고? 나 빼고 둘이서? 갑자기 날카로운 불안감이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왜 나에게 연락도 안 하고 둘이서만 만난 것일까? 둘이 함께 하고 있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나의 눈빛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우는 나의 감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하영이에게 살짝 떠봤었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랬더니 착하고 좋은 친구라고, 얘기도 잘 통해서 항상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봤지. 그런 거 말고 혹시 남자로서는 어떠냐고. 그랬더니 처음엔 웃으면서 나한테 뭐 하는 거냐고 하더라. 그래서 그냥 재미 삼아 가정해 보는 거다, 말해봐라, 이랬지.”
그녀와 상우의 관계에 대한 불안한 기분과는 별개로 나는 그녀가 상우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캔맥주를 들고 있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영이가 얘기하더라고. 자기는 지금 남자 친구 같은 거 관심도 없고 만들고 싶지도 않다고. 그리고 만약 남자 친구를 만난다고 해도 친구처럼 지내다 연인이 되는 건 별로라고 말이야. 내가 볼 때 하영이는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연인으로 바뀌는 거는 원하지 않는 거 같았어.” 상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도 이러한 말을 해서 미안하고 당황스러운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네가 하영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당장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지는 말고 조금 더 기다려보자. 시간이 지나면 하영이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우선은 친한 동네 친구로 계속 지내는 게 어떨까 싶다.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상우는 말을 마친 뒤 나를 위로하려 하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맥주를 마셨다. 상우를 통해 들은 것이긴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고 나니 허탈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선택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그냥 친구로 지내던지, 아니면 그 시기가 언제가 됐든 내 마음을 고백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던지.
“그래, 그럴 거 같더라. 우선은 기다리는 게 맞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상우를 향해 불쑥 말했다.
“너 근데 하영이랑 단 둘이 술은 왜 마신 거냐?”
상우는 처음에 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야 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내가 하영이하고 무슨 관계일까 봐?” 그는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와 웃긴다 너. 며칠 전에 집에 들어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어. 걔도 퇴근하는 길이더라고. 그래서 같이 집에 오는 길에 밥이나 먹을 겸 술 한잔 하자고 했지. 그리고 어차피 금방 먹고 들어갈 거니까 굳이 너는 부르지 않은 거고. 진짜야.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 놀랐다 야.”
상우는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계속 웃으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나는 뭔가 미심쩍기도 했지만, 괜히 친구를 의심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시던 캔맥주가 이미 비어버린 것을 알고는 몇 캔을 더 사서 우리 집 옥상으로 이동했다.
학교에 복학한 이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1학기가 끝나버렸다. 적응도 제대로 못한 채 허둥지둥 대학생활을 쫓아가다 보니 결국 남은 건 엉망으로 나온 성적뿐이었다. 다들 복학하면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도 잘 나온다고 하는데 난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대학생활과 앞으로의 미래,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마음까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정리된 것 없이 여름은 시작되었다.
방학이 되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뒹굴 거리고 있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저녁에 시간 되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문자가 왔다. 얼마 전 상우와의 만남 이후 그녀를 만나는 게 괜히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을 숨긴 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나도 모르게 갑자기 고백이 튀어나와 버릴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가 먼저 보자고 하니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에게 등신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손가락은 그녀에게 시간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상우도 부를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은 그냥 둘이서 만나자고 했다. 둘이서 가볍게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답문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그리고 당연하게도─내가 상상했던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드디어 퇴사를 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달했고 오늘까지 근무였다고 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들은 그녀의 퇴사 소식에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축하를 해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은 이제 자유라고, 해 보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고, 그러니 나보고 축하를 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축하해. 그러고 보니 네가 예전에 회사 그만두고 뭔가 다른 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너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면서.”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소주잔을 들었고, 그녀는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소주를 한 번에 비워냈다.
“응.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 난 겨우 스물다섯 살이고, 사무실에 앉아서 광고주들 기분이나 맞춰가면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그림 그리는 건 더 이상 못하겠어. 이제부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낸 거야?”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난 예전부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시작도 하기 전에 그게 무엇인지 말해버리면 그 일이 현실이 되지 못하고 물거품이 될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거든.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 진지하게 시작해보기로 결심을 했거든.”
나는 그녀에게 그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건 특별히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너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
“갑자기 이름 뜻은 왜? 하영? 글쎄. 무슨 뜻인데?”
“여름 하에 노래할 영, 여름을 노래한다는 의미인데 할아버지는 여름이 가장 생기 넘치고 건강한 시기라고 생각하셨나 봐. 그러한 여름을 노래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기 있고 건강하게 살길 바라셨던 거지. 난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는데 말이야. 어쨌든 내가 갑자기 이름 얘기를 왜 했냐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이름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과연 그녀가 하려고 하는 일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고 두 손을 테이블 위에서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난 작가가 될 거야.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일러스트 작가 말이야.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들을 나의 글과 그림으로 노래해보고 싶어. 어때? 내 이름이랑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할아버지는 내 미래를 미리 아셨나 봐. 물론 여름만을 노래할 건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를 말해 주었다. 밝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은 흥분되고 설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서 흥분이 되고 기대가 되었다. 자기의 꿈을 위해 도전하고 실천하는 그녀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은 정말 연애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빨리 너의 작품을 보고 싶다. 최하영 작가가 어떤 것을 노래할지 궁금해. 너라면 분명 멋진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지금 한창 구상 중인 게 있는데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너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게. 너라면 분명 멋진 조언을 해줄 것 같아.”
그녀의 대답에 나는 기뻤다. 비록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친구로서 작품을 함께 공유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고 그녀와 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계속 함께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한동안 그녀와 연락도 하지 못했고, 만나지도 못했다. 작품 구상에 한창일 그녀를 생각하니 먼저 연락을 하는 게 망설여졌다. 나는 당분간은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앞으로의 나의 모습에 대해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괜히 학교 도서관에 가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전공 서적을 보기도 하고, 영어 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어쨌든 나도 뭔가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만 했다.
상우와는 여전히 자주 만나 함께 맥주를 마시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여름을 버텨나갔다. 상우는 혹시라도 내가 그녀에게 고백을 한 건 아닌지 수시로 체크했고, 내가 요새는 연락도 안 하고 안 본 지 오래됐다고 하자 왠지 모를 안도의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상우에게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을 내 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름방학이 어느새 끝나버리고 개강을 한 9월의 첫째 주에 드디어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맥주나 한 잔 하자고. 그리고 상우도 시간 되면 같이 보자고. 그녀의 문자가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아마 다른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취소를 했을 것이다. 상우에게도 연락을 해서 같이 보기로 했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를 본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마음이 설렜다.
우리는 오랜만에 셋이 모여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여전히 상우가 재밌는 얘기와 특유의 넉살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둔 얘기를 아직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장소를 옮겨 우리 집 옥상으로 이동했다. 예전부터 우리는 모임의 마무리를 여기서 하곤 했다.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옥상에 있는 평상에 앉아 동네의 야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것을 우리 모두 좋아했다.
옥상에 자리를 잡고 준비를 마쳤을 때 그녀가 갑자기 우리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가방에서 A4용지를 꺼내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아무 질문도 하지 말고 우선 쓰여 있는 글을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드디어 그녀가 작품 구상이 끝났구나 생각하며 반가워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우가 함께 있을 때 이렇게 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조금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첫 장에는 한가운데에 제목만이 쓰여 있었다.
「벙어리 덩굴나무와 말이 없는 소년」.
나는 첫 장을 넘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줄부터 천천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