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덩굴나무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둡고 버려진 장소에서 은밀하게 자란다. 길가의 화단이나 공터의 흙바닥은 물론이고, 보도블록의 이음새나 건물의 갈라진 틈에 약간의 흙만 있어도 쉽게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는 주변의 벽이나 잡목, 혹은 버려지고 잊힌 채 더 이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물건들 위로 얇고 구불거리는 짙은 녹색의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벙어리 덩굴나무는 추운 겨울 동안에는 흙 속에서 뿌리로 지내고 있다가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3월 중순부터 연녹색의 구불거리는 줄기를 지상 위로 뻗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4월이면 무성하게 자란 줄기에서 쌀알만 한 크기의 하얀색 꽃이 잔뜩 핀다. 그 작은 꽃 속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미세한 꽃가루가 가득 들어있는데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면 그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게 된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래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벙어리 덩굴나무이지만 이 나무의 꽃가루는 사람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그 꽃가루가 사람의 혀를 완전히 마비시켜 영원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봄바람에 날려 떠다니던 꽃가루가 입속으로 들어가 혀에 묻게 되면 그 자리에 곰팡이와 비슷한 하얀 균사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 균사에서 만들어 내는 독성 성분이 혀를 서서히 마비시킨다. 완전히 마비가 된 혀는 다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고, 결국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꽃가루가 혀에 묻은 뒤 균사가 자라 혀를 마비시키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꽃가루가 입 속에 들어와 혀에 묻는다 해도 오랜 시간 동안을 말을 하지 않거나, 음식이나 물을 오랫동안 섭취하지 않거나, 아니면 양치를 안 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벙어리 덩굴나무의 꽃가루에 의해 사람의 혀가 완전히 마비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말 무섭고 두려운 식물인 벙어리 덩굴나무를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세상의 희귀 식물 사전」 中 ‘벙어리 덩굴나무’ 편에서-
소년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즈음 그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들리는 모든 말을 따라 하고, 쉴 새 없이 단어를 내뱉으며 자신의 언어를 부지런히 늘려갔다. 그때는 오히려 말이 너무 많아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귀찮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 어느 순간부터─아마 그의 열 번째 생일이 지나고 나서부터─그는 자신이 배워야 할 말을 이제는 모두 배워 더 이상 소리를 내며 언어를 습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듯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가끔씩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순간에만 마치 최대한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려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짧게 말을 하였다. 그나마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조차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자신의 의사를 몸짓이나 표정 등을 통해서만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봐야만 했다.
그의 부모는 소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를 이런저런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진찰을 받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특별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건강상태, 지적능력 등 모든 면에서 소년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사실 소년은 말을 하지 않아도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지식을 익히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소년의 부모도 그가 스스로 불편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소년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존중해주기로 했다.
소년은 그렇게 말없이도 문제없이 학교에 잘 다녔다.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가까운 친구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곤 말이다. 종종 말이 없는 소년에게 흥미를 느끼고 먼저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흥미가 오래가는 경우는 없었다. 아이들은 곧 말이 없는 소년과의 관계에서 어색함과 때로는 두려움까지 느꼈고, 결국 소년에게서 떠나갔다. 때때로 떠나면서 소년에게 크게 화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소년은 그들이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가끔씩 쓸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년이 되어갔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4월의 어느 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소년은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한 소녀가 뛰어 오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반이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은 아이였다. 그녀는 이번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전학을 왔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만큼 소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는 못했다.
“안녕, 나 너랑 같은 반인데, 알고 있지? 며칠 전부터 봤는데 너 나랑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더라.” 소녀는 뛰어 오느라 가쁜 숨을 고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소년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한테 너에 대한 얘기는 들었어. 네가 학교에서,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말이 없는 아이라던데?”라고 말하며 소녀는 뭐가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고 소년은 계속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했다.
“난 너하고 완전 반대야. 난 정말 말이 많거든. 난 이것저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하고 싶은 말들을 쉴 새 없이 바로바로 얘기해버려. 그래야 답답하지 않고 기분도 좋거든. 그런데 엄마는 나보고 제발 잠시만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 보래. 내가 또래에 비해 키가 작은 것도 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래. 모든 영양소들이 키로 가지 못하고 말하는 데 쓰여 버린다나.” 소녀는 또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어느새 둘은 각자의 아파트 단지로 가기 위해 헤어져야 하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했고, 소년은 소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물었다.
“어땠어? 내가 너무 시끄러웠니?” 소녀는 잠시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너만 괜찮다면 우리 앞으로 집에 올 때 같이 와도 될까? 혼자 오는 것보단 둘이 같이 오는 게 심심하지도 않고, 또 네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거 같아서 나도 좋았거든. 물론 네가 싫다면 혼자 집에 오고.”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함께 걸어오는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소녀는 분명 수다스러웠지만 그녀가 하는 얘기는 재미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에 좋은 적당한 크기와 밝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같이 오자.”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와, 대답해주다니 영광이야.” 소녀는 또 웃었다. 키득키득.
“그럼 내일 봐, 안녕.” 소녀는 오른손을 흔들며 집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년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날 이후로 소년과 소녀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함께 집까지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소녀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년에게 해줬다. 전날 밤에 본 TV 방송 이야기부터 학교에서 친구들과 나눴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리고 매일 아옹다옹하는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년은 여전히 말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면서 조금씩 작은 몸짓과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하지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괜찮아. 내가 그만큼 더 얘기하면 되니까.” 소녀는 특유의 키득거리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왼쪽 볼에 있는 움푹 들어간 작은 보조개에 짧은 순간 햇빛이 머금어졌다. 소녀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집 방향으로 뛰어갔다. “내일 보자, 안녕.”
소년은 소녀와 헤어진 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로 가 구석진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 주변으로 낮은 관목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소년은 벤치에 앉아 소녀에 대해 생각했고 소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누구와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것은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얘기에 소리 내어 맞장구 쳐주고 싶었고, 재밌는 없겠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본인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내일부터는 나도 얘기를 해야지. 그 애도 분명 좋아하겠지. 어떤 얘기부터 할까.’ 소년은 어떤 얘기부터 해줄지 상상하면서 자신의 작은 입을 위아래, 양옆으로 벌리며 ‘아아’하는 소리도 내보았다. 소년은 부끄러움에 수줍게 웃었지만 가슴은 설렘으로 두근거렸고 어서 빨리 내일이 오기만을 바랐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4월의 부드러운 햇살은 소년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고 소년은 온몸에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꼈다. 그리고 가방을 끌어안은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놀이터 벤치 뒤편의 그늘진 곳에 자라고 있던 벙어리 덩굴나무에서는 이제 막 꽃이 피었고, 그 속에 있던 꽃가루가 부드러운 봄바람에 실려 공기 중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꽃가루의 일부가 벤치에 앉아 있던 소년의 입 속으로 들어가 혓바닥 위에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하얀 솜털과도 같은 균사가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간이 한참 걸렸을 균사의 성장이 소년의 혀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동안 말을 너무 하지 않은 소년의 혀가 보통 사람들의 혀와는 다른 상태로, 어쩌면 벙어리 덩굴나무의 꽃가루가 반응을 일으키기에 최적의 상태로 변해버린 건지도 몰랐다.
소년은 소녀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얕은 잠에 들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소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소년의 혓바닥 전체에 퍼진 균사에서 나오기 시작한 치명적 독은 소년의 혀를 조금씩 마비시키고 있었다.
“어때?”
그녀는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글을 다 읽은 우리에게 물었다.
“이게 지금 쓰고 있는 글인 거야?” 상우가 종이를 앞뒤로 넘겨가며 물었다.
“응. 아직은 초고야. 내용도 더 다듬어야 하고, 글이 완성되면 일러스트도 그려 넣을 거야. 그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너희들에게 특별히 제일 먼저 보여주는 거야.”
나와 상우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글의 내용보다는 그녀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상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그녀가 그 사실을 나에게만 말해준 거라고,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의 비밀을 나에게만 알려준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우와 둘이서 만났을 때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그건 그녀와 나 둘만이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비밀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멍청한 오해였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지난번 그녀는 글을 쓴다는 사실을 내게 처음으로 말하는 거라고 했었지 나한테만 말해준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초라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동안 내게 얘기하지 않았던 상우에게 화가 났다.
“음, 우선은 조금 놀랐어. 네가 처음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솔직히 별 기대 없었거든. 그런데 와, 너무 괜찮은데?” 침묵을 깨고 상우가 먼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체적으로 글의 분위기가 신비하기도 하고 쓸쓸하면서도 또 따스하기도 하고. 그런데 글의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아쉽긴 해. 소녀를 만나서 이제야 말을 해보려 하는데 벙어리가 되다니. 소년이 불쌍해.”
“결말에 대해선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한건 아닌데 해피엔딩으로 끝내기엔 뭔가 어색할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써보자고 생각하기도 했거든.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로. 어쨌든 결말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볼 생각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우의 의견에 대해 대답했다. 그리고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 표정이 너무 심각한 거 아냐? 내 글이 그렇게 별로야?” 나도 모르게 둘 사이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워진 감정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풀고 그녀의 글에 대해 집중했다.
그녀의 글은 분명 흥미로웠다. 결말에선 여운이 느껴져 좋았다. 그리고 딱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글의 주인공인 말을 하지 않는 소년에게 강하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제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할 수 없게 된 소년이 마치 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들은 잊고 천천히, 그리고 내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며 글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나도 결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글의 결말이 지금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여운도 남아서 좋긴 하지만,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관계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개인적으로는 어떻게든 둘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 이건 나의 진심이었다. 둘은 계속해서 이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벙어리가 된 소년을 혼자 쓸쓸하게 두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이 이후의 이야기가 더 있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소년은 결국 벙어리가 되었지만 소녀가 그의 곁에서 계속 함께 하는 거지. 나는 소녀가 소년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꼈거든. 처음부터 소녀는 말없는 소년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좋아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 소녀에게는 마치 어떤 운명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둘은 더 이상 목소리를 통한 대화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소녀는 수화를 배워서 소년과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소녀는 소년을 위해 충분히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비극에 빠진 소년에게 소녀가 구원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면 어떨까 싶어.”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종종 그녀가 흥미롭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반응할 때 그 큰 눈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와, 나쁘지 않은데? 소년을 구원해 주는 소녀. 나는 소년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사실 소녀의 역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거든. 네 말대로 소녀가 먼저 다가와서 소년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절망에 빠진 소년의 곁에 있어 주면서 희망을 주는 존재도 소녀이면 좋을 것 같아. 소통의 방법이 수화인 것도 좋은 아이디어고.”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네 얘기를 듣고 나니 따뜻한 느낌의 결말로 가는 것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 고마워.”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옆에 있던 상우가 이런 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넌 문과 체질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니까. 공돌이 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을 그의 실없는 농담이 지금은 조금 거슬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상우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맥주를 마실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도대체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쓰게 된 거야? 벙어리 덩굴나무라니. 설마 진짜 있는 건 아닐 거고. 상상력 좋다, 너.”
상우의 질문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 아래 숨겨져 있던 그녀의 작고 하얀 귀가 드러났다. 둥글둥글한 주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그녀의 귀는 손으로 정성스럽게 빚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웠고 어둠 속에서 유독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각자의 생각을 말을 통해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실제로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의미도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싫어하는 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본인의 단어를 사용해서 본인만의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그 어떤 의미도 전달될 수 없고, 정작 말을 하고자 결심했을 때에는 본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이런 생각들을 상징적으로 얘기해보고 싶었어.” 그녀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골라가며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의 귀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의미도 전달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마치 깊은 골짜기를 계속 맴도는 메아리처럼 내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골짜기 이곳저곳에 부딪치다 다시 내게 돌아온 메아리는 이렇게 바뀌어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그 순간 내 안의 깊숙한 어딘가에서 낮은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맞춰 내 심장박동도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먼 하늘로 옮긴 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네 얘기를 듣고 나니까 꼭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해야만 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말이라는 수단보다는 전달하려는 의미, 그리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자세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뭐가 맞는 건진 모르겠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멋지다, 최하영 작가님. 어서 빨리 유명해져라. 나도 유명 작가 친구 좀 해보자.” 맥주캔을 들며 상우가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상우를 바라보고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유명해지거나 아니면 평생 무명작가로 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너 내가 무명작가여도 나랑 계속 친구 해줘야 돼.”
우리는 다 같이 건배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녀와 상우의 짧은 대화를 들은 순간 둘의 사이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 속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어떤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둘은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 의심은 어떠한 이성적 판단 과정도 없이 곧 확신으로 바뀌었고 나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나 혼자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들은 순식간에 나의 사고를 완전히 잠식해버렸고,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늘 밤 하영이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두려움에 말 못 하는 벙어리가 되기보다는 분명한 나의 목소리로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말해줄 것이다.
늦여름 밤의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우리들 사이를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빈 맥주캔을 천천히 찌그러뜨리며 어느새 더 커져버린 내 안의 북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냐?” 상우가 나를 보며 물었다. 상우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상우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 자식 이상한데. 나 담배 사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하영아, 맥주 더 마실래? 더 사 올까?” 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 더 마실 건지 물어보았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갔다 올게. 야, 빨리 일어나. 같이 가자니까.” 상우가 나를 보며 재촉했다.
“아니, 난 여기 있을게. 너 혼자 다녀와.” 나는 상우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우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결국 혼자서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계단실 앞에 도착한 상우는 뒤를 돌아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듯 보였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오른팔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계단실의 센서등이 켜졌고, 상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잠시 뒤 센서등은 꺼졌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내 발 주위를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를 보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벌레는 내 오른발 앞에서 멈춰 서더니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하늘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벌레를 따라 나의 시선도 하늘로 향했다. 밤하늘에는 옅은 구름 사이로 거의 보름달에 가깝게 차오른 달이 밝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귀는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없이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그녀에게 고백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영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에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마음을 천천히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떠나가고 난 뒤 나는 홀로 평상 위에 앉아 밤의 정적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동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누군가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다른 어딘가에서 오토바이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건물들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을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그 불빛 아래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풍경은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나와 하영, 그리고 상우의 관계는 이제부터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수줍게 마음을 고백한 순간, 그녀가 미안해하며 그 고백을 거부한 순간,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상우가 문자메시지를 보내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사실은 하영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했었다는 것을 내게 알려준 순간, 그 순간들마다 조금씩 어긋나던 우리들의 관계는 이제는 완전히 틀어져 버려 예전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피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담배는 없었다. 상우를 다시 부를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평상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것부터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상우에게 그녀를 소개해 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질투와 의심, 성급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어리석은 나 자신이 가장 큰 잘못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너무나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벙어리가 된 채 계속해서 말이 없는 소년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우습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오른팔로 두 눈을 가린 채 한동안 가만히 평상 위에 누워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내린 따뜻한 눈물이 귀 언저리에서 차갑게 식으며 말라갔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을 통해 계절의 온도가 희미하게 변한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함께 이십 대 한가운데에서 만났던 이 뜨거웠던 여름도 어느덧 다가온 차가운 계절의 뒤로 그렇게 초라한 눈물자국만을 남긴 채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