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의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 사이에 많은 비가 예상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하늘이 맑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멍하니 차창 밖의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길 것만 같았던 여름의 낮은 어느새 훌쩍 짧아져 있었다. 도시가 머금고 있던 빛의 농도가 서서히 흐릿해져 가고 있었고, 거리의 간판들은 점점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직장 동료들이 금요일 밤인데 퇴근 후 같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했지만 나는 선약이 있다 하고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완전히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식탁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집안의 고요함이 보이는 듯했다. 식탁 위의 조도가 낮은 작은 스탠드만을 켜놓았기에 그 고요함은 따스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음악이라도 틀까 하다가 딱히 떠오르는 음악도 없었기에 그만두었다. 그저 맥주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마시며 집안 가득한 노란빛 고요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는 동떨어진 깊은 동굴 속에서 홀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고요히 내면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으니 어김없이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최하영을 왜 만나려 하는가?
며칠 전 우연히 그 포스터를 보았을 땐 반가움과 신기함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안 지나서 곧 내가 갑작스럽게 그녀 앞에 나타나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다시 그녀를 만나는 게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도 스스로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지 10년도 더 지나 갑자기 나타나서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하고,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 수 있을까? 다시 예전과 같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가? 그녀는 어쩌면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당혹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어색한 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녀를 만나자고 생각한 이후로 이러한 생각들이 매일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의 안타까웠던 고백의 순간 이후로도 나와 하영, 상우는 한동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함께 했다. 하지만 서로의 분위기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상우에게 고백을 했고, 상우는 그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그녀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와 상우는 이 사실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고, 우리 셋은 여전히 동네 친구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안 이 이상한 관계는 우리가 함께 할 때면 서로의 말과 행동을 어쩔 수 없이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배우들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차츰 서로 간의 연락과 만남이 뜸해졌고, 상우가 갑자기 결혼을 하고 내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와 그녀는 더 이상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보지 못한 지 10년이 넘은 것이다.
나의 결정에 정답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내일의 기분과 선택에 맡겨보자고 생각하며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맥주 한 캔을 다 마셔버린 것을 깨닫고는 냉장고에서 한 캔을 더 가지고 왔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포털 사이트의 주요 기사를 읽고, 유튜브의 영상을 보고, 인스타그램의 새로운 게시물들을 확인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쓸데없는 정보들로 머릿속의 그녀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씩 밀어내었다. 한참을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낸 뒤 나는 양치를 하고 스탠드를 끈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꿈을 꾸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나는 맨발로 비를 맞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애타게 신발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앞에서 걸어가던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하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 신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그녀를 쫓아 걸어갔지만 거리에는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빗물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기가 점점 힘들어져 갔다. 나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하영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리고는 꿈에서 깼다.
새벽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바깥에는 무섭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지면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빗소리와 천둥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것이 폭우에 휩쓸려 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라진 내 신발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어젯밤의 빗소리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본 듯한 커다랗고 하얀 뭉게구름들이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떠있었다. 골목길 곳곳에는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물웅덩이가 있었다. 만약 물웅덩이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어제 그 상황이 꿈을 꾼 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고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 아침의 날씨와 기분에 어울리는 음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선반에 꽂혀있는 바이닐 레코드를 이것저것 뒤적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고 재생 스위치를 눌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1악장의 당당하고 경쾌한 선율이 조금은 과장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과장스러움이 비가 그친 뒤 맑게 갠 파란 하늘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창문을 통해 시원하고 신선한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어젯밤 꿈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눈을 뜬 순간 이미 꿈은 흐릿해져서 기억의 저 너머로 사라진 듯했다. 단지 그녀에 대한 꿈이었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꿈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에 느닷없이 나는 오늘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이것저것 예상하지 않기로 했다. 예상이란 다 빗나가기 마련일 뿐이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10년 전과는 많이 변해버린 얼굴이 욕실의 환한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피부는 분명 탄력이 줄어 있었고, 피부색도 예전보다 더 까매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살이 조금 쪘으며, 헤어스타일도 10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면의 어떤 것이 본질적으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과연 나를 바로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다면 조금 난처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내 소개를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할 수밖에.
바깥 날씨는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햇살이 여전히 따갑긴 했지만 공기 자체는 선선해서 그늘 속에 있으면 쾌적함이 느껴졌다. 북 콘서트가 열리는 서점이 위치한 종각역에는 북 콘서트가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집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이 가만히 있기가 싫어 일찍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거리에는 쾌청한 날씨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인파 속에 섞여 종로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북 콘서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충분히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종로3가역 사거리까지 오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무심코 서울극장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극장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예전만큼의 활기는 없는 듯 보였다.
문득 예전에 그녀와 이곳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그녀에게 같이 보자고 해서 봤던 영화였다. 난 이미 그때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같이 영화를 보는 게 마치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것 마냥 설렜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마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영화도 주로 남자들이 좋아하는 액션 영화였기에 어쩌면 그녀에게 그 시간은 정말 지루했던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난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바보같이 그저 혼자 좋아서 헤죽거렸을 것이다. 서울극장을 바라보며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다시 종각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 서점으로 들어갔다. 주말을 맞아 서점 안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서점 게시판의 포스터에서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한번 더 확인했다. 포스터 하단에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오늘 그녀를 만나는 게 과연 맞는 건지 또다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았다. 북 콘서트 시간까지는 아직 30분도 넘게 남아있었고, 나는 미리 그 장소에 가지는 않기로 했다. 괜히 그 주변에 있다가 시작 전에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당황스럽고 그녀도 당황스러워할지 몰랐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내가 혹시라도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사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점의 스피커에서는 조용하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비틀즈의 ‘Two of Us’였다. 비틀즈의 마지막 정규앨범인 ‘Let it be’ 앨범의 1번 트랙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 앨범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곡이었다. 가사는 잘 몰랐지만 후렴구의 ‘우리는 집에 가고 있어(We’re going home)’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문구와 잡화를 파는 곳을 둘러보던 중 즉석카메라를 파는 매장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는 작고 세련된 디자인의 즉석카메라들을 팔고 있었다. 예전의 크고 투박한 디자인의 즉석카메라하고는 많이 달라졌구나 생각하는 순간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의 생일은 12월 20일이었다. 고백 이후 그녀와의 사이는 분명 어색하긴 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생일선물이자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보 같게도 그때는 그러고 싶었다. 나는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하다가 그녀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즉석카메라를 주기로 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내게는 부담스러웠던 돈을 주고 구입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생일을 축하하고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메시지를 적은 카드와 함께 그녀의 생일 전날 밤에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확인한 그녀는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부담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단순한 생일선물일 뿐이고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먼저 돌아서서 집으로 왔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나서 기분이 슬픈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제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던 어느 날 밤에 그녀에게서 잠깐 만나자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러 나갔다. 그날 밤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더플코트의 모자를 눌러쓴 채 공원 입구에 있는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생일선물을 받고는 고맙다고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미안했다며 작은 케이크 상자와 카드를 내게 주었다. 그녀는 선물 정말 고마웠고 잘 쓰겠다며 말했고 나도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연말 잘 보내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하고는 눈 내리는 가로등 아래 바로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카드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카드에는 나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를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친구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카드를 반복해서 계속 읽었다. 나의 어리석은 속마음을 그녀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고, 그녀가 그것을 다시 한번 거부한 것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나는 창문을 열어 카드에 불을 붙이고는 눈이 내리고 있는 밤하늘로 재를 날려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분명 그녀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언젠가 다시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녀에게 받은 카드를 태우면서 그 미련을 스스로 정리하려 했던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도대체 왜 그랬었는지, 모든 게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진열되어 있는 즉석카메라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고는 내가 준 카메라를 아직도 그녀가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어느새 시간이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행사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좌석은 이미 자리가 다 차 있었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나는 서있는 사람들 뒤로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 저편에서 그녀가 진행자와 함께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사진으로 봤던 것과는 다르게 예전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얀 피부와 큰 눈, 마른 체형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웃을 때 왼쪽 볼에 생기는 보조개도 여전했다. 진행자가 북 콘서트 시작을 알렸고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청중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도 그대로인 듯했다. 말을 하는 동안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니 자신이 좋아하고 흥미 있어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 눈이 반짝거리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고 흥미 있어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중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모르게 갑자기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10년 전에 비해 나만 나이가 들고, 나만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 그 순간 이후로 서로 다른 시간의 속도를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시간의 속도를 다시 맞추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이제는 서로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청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게 서로에게 맞는 것 같았다. 나는 행사 장소를 떠나면서 무대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고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그 장소를 떠났다. 내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깥의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공기는 아까보다 더 선선해져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갑자기 아까 서점에서 들었던 비틀즈의 ‘Two of Us’가 듣고 싶어 졌다. 가방 속에서 멋대로 선이 엉켜있던 이어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풀어 스마트폰에 꽂았다. 음악 스트리밍 앱에서 ‘Let it be’ 앨범을 재생시키자 익숙한 기타 리프와 함께 ‘Two of Us’가 시작되었다. 나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읽어보았다.
Two of us riding nowhere spending someone's hard earned pay
(누군가가 힘들게 번 돈을 쓰며 우리 둘은 정처 없이 차를 타고 있어)
You and me Sunday driving not arriving on our way back home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닿지 않는 너와 나의 일요일 드라이브)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going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Two of us sending postcards writing letters on my wall
(우리 둘은 엽서를 보내고 벽 위에 편지를 쓰고 있어)
You and me burning matches lifting latches on our way back home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빗장을 들어 올리며 너와 난 성냥을 켜고 있어)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going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You and I have memories(너와 난 추억을 가지고 있어)
Longer than the road that stretches out ahead(우리 앞에 펼쳐진 길보다 더 긴 추억을)
Two of us wearing raincoats standing solo in the sun
(우리 둘은 비옷을 입고 태양 아래 홀로 서 있어)
You and me chasing paper getting nowhere on our way back home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와 나는 종이조각을 쫓으며 어디에도 못 가고 있어)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on our way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We're going home(우린 집으로 가고 있어)
반복 듣기로 계속 들으며 가사를 곱씹어 읽어 보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가사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슬프고 쓸쓸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내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어 바깥의 바람을 맞았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의 황금빛이 길가의 가로수에 부드럽게 반사되어 잘게 부서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늘한 바람과 따뜻한 빛을 얼굴에 맞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귀에서는 폴 매카트니가 계속해서 우린 집으로 가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