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겸은 6시가 되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무리하려면 해야 할 작업이 한참 남아 있었지만, 내일까지 하면 되는 것이니 내일 하기로 했다. 어쩌면 내일 안으로 끝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상사에게 또 한소리 들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프로그램을 닫고 컴퓨터를 종료할 때 살짝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걱정을 애써 떨어트리고 짐을 챙겨 사무실에서 나왔다. 엘레베이터 앞에 선 수겸은 엘레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예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뻔뻔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움인지 아니면 자조감인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하강 버튼을 눌렀다.
거리로 나온 수겸은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아마도 대부분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걸었다. 도로는 이미 차량으로 꽉 차, 여기저기서 날 선 경적이 쉴 새 없이 울렸다. 6시에 맞춰 도시가 토해내듯 거리 위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차량들의 거대한 무리를 바라보며, 수겸은 이들도 자신처럼 똑같은 일상을 겨우겨우 버텨낸 뒤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온 것일지 궁금했다.
‘아니지. 분명 보람차게 하루를 보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다 나 같으려구.’
수겸은 도로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의 붉은색 후미등을 바라보다 무심코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미처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못한 태양의 붉은 입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끝까지 알리려는 듯 저 멀리 도시와 서쪽 하늘이 맞닿고 있는 경계 부근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농도의 주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져 있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손톱달이 투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벌써 짙은 어둠이 내렸을 시간인데, 확실히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걸 수겸은 느낄 수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이 계절도 서서히 그 끝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저 앞으로 보이는 지하철역 출입구를 향해 조금 더 속도를 내 걸어가던 수겸은 문득 누군가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수겸이 맞지? 정수겸. 야 오랜만이다.”
그는 왼손을 들어 수겸의 오른쪽 어깨를 어루만지며 정말로 반갑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겸은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와, 민호형! 반가워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진짜 오랜만이다.”
수겸과 민호는 대학교 같은 과 졸업 동기였다. 학번은 수겸이 세 학번 위였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학교에 늦게 들어온 민호가 나이는 더 많았다. 수겸이 군 제대 후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민호도 3학년이었고, 둘은 함께 전공수업을 들으며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민호는 성격이 좋고 동기들을 잘 챙겨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민호는 학번과는 상관없이 수겸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수겸도 복학 이후 학과 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지나가는 걸 봤는데 너인 걸 딱 알겠더라. 이 근처에서 일해?”
“네, 사무실이 이 근처예요. 형은요?”
“나도 이 근처야. 원래는 성수동에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강남으로 사무실이 이사했어. 퇴근하는 길이야?”
“네, 집에 가는 길이에요. 형은요?”
“나는 아직. 저녁 먹으러 가는 중이었어.”
민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그와 일행인 듯 보이는 사람 두 명이 얇아 보이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편의점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야근하나 보다. 설계사무소 다니는 거예요?”
“응. 너는?”
“나는 부동산 개발 회사 다니고 있어요.”
수겸과 민호는 건축설계를 전공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설계사무소에 취업한 민호와 달리 수겸은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 직후에는 동기들과 함께 종종 만나곤 했던 둘은 서로의 분야가 달라지며 점점 만남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오늘 이렇게 거리 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는 했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거였기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둘 다 잘 몰라 서로 웃기만 하는 어색한 시간이 짧게 흘렀다.
“이 근처면 언제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형.” 수겸이 어색함을 먼저 깨고 말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거리 위에 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쪽을 보고 있는 민호의 일행들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러자. 언제 한번 점심을 같이 먹어도 좋겠네. 아니면...” 민호가 대답했다. 그리고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끝을 흐리며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겸도 그 표정을 읽었지만 먼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민호를 바라보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민호는 그런 수겸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혹시 지금 뭐 바쁜 일이나 약속 있어?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을래?”
수겸은 딱히 약속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만나 밥을 먹어도 괜찮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민호와 불편한 사이는 아니지만, 분명 조금 어색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을 한 수겸은 결국 민호와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예상되는 어색함보다는 그동안의 소식에 대한 궁금함이 앞섰다.
“근데 저녁 먹고 야근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요?”
“야근이야 뭐 매일 하는 건데. 괜찮아.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는 거지.”
민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 뒤 수겸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고 편의점 앞의 일행들에게 갔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일행은 어디론가 가고, 민호는 수겸에게 돌아왔다.
“그럼 밥 먹으러 가볼까? 괜찮으면 술도 한잔하자.” 민호는 살짝 신이 난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식당을 향해 앞장서며 말했다.
수겸과 민호는 인근의 초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수겸은 몇 번 와본 식당이었다.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으면서 맛도 괜찮고 실속 있게 나오는 집이라 회사 근처에서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식당 중의 하나였다. 둘은 각자 모둠 초밥과 생맥주를 주문했다.
“어때? 잘 지내고 있어?”
먼저 나온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신 뒤 민호가 먼저 수겸에게 물었다.
“그냥 그렇죠, 뭐. 별다른 일 없이 살고 있어요. 형은 어때요? 계속 설계를 하고 있었네, 형은. 역시.”
“해온 게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계속하는 거지 뭐.”
“에이, 왜 그래요. 우리 동기 중에 형이 설계를 제일 좋아하고, 또 제일 잘하기도 했잖아.”
민호는 수겸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수겸도 그런 민호를 보며 별다른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결혼은 했어?” 민호가 수겸에게 물었다.
“네.”
“했구나. 언제?”
“이제 3년 됐어요. 형은?”
“난 아직.”
“안 하려고요?”
민호는 대답에 뜸을 들였다. 맥주잔 겉에 맺힌 물방울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비혼주의는 아닌데... 그냥 아직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네.”
“뭐 요새는 마흔 넘어서 하는 것도 그렇게 늦다고들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죠, 뭐.”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둘의 대화는 이어질 듯 이어질 듯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수겸이 걱정한 어색함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사이였기에 서로 공통의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주제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로 대화 주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때마침 모둠 초밥이 나왔다. 둘은 젓가락을 들고 천천히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민호가 다시 수겸에게 물었다.
“일은 어때? 네가 우리들 중에선 가장 잘 나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럴 리가. 잘못된 소문이 났네. 그냥 월급쟁이일 뿐인데, 뭐.”
“일은 바빠?”
“한창 바쁠 때는 정신없었는데, 요새는 그렇지도 않아요. 음... 엄밀히 말하면 제가 요새 일을 잘 안 해요. 마음이 뜬 것 같기도 하고.” 수겸은 말을 하면서 아까 퇴근할 때 엘레베이터 문에 비쳤던 자신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마음이 뜬 거야. 그러니 뻔뻔해졌지.’
“형은 야근 많이 해요?” 수겸이 민호에게 물었다. 민호는 입안의 초밥을 완전히 다 삼키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글쎄, 많이 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너도 잘 알잖아. 이쪽 업무 패턴.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다음 날 늦게 출근하고. 다시 또 늦게까지 작업하고, 또 다음 날 늦게 출근하고. 업무시간으로 계산하면 아마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것과 비슷할걸.”
“설계는 밤에 해야 제 맛이죠.”
수겸의 말을 들은 민호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수겸도 함께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학교 다닐 때 참 많이 밤샜어, 그죠?”
“그것도 학생 때니까 그렇게 했지, 나이 먹고 하려니 힘들어. 몸도 축나는 것 같고.”
“그때 참 재밌었는데. 설계실에서 다 함께 밤새면서 말이에요. 혹시 동기들하고 지금도 연락 계속해요?”
“응. 몇몇은 지금도 연락하고 자주 만나. 은혁이, 지성이, 성규. 얘들이야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까 업무적으로 만날 일도 많고, 술도 한잔씩 하고 그래. 세정이도 유학 갔다 돌아와서 얼마 전에 다 같이 한번 봤고. 다들 잘살고 있어. 다음에는 너도 같이 보자.”
수겸은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들을 듣고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졸업 직후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풋풋한 사회초년생의 모습이었고, 누군가는 취업준비를 하며 조금은 의기소침해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모두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그 모습에서 여유와 노련함이 느껴질지, 아니면 자신처럼 조금은 일에 지쳐 권태로움이 느껴질지 수겸은 궁금했다.
“혹시 은정이는 연락해요?” 수겸은 동기들 얘기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예전부터 그 소식이 궁금했던 은정이에 대해 민호에게 물어보았다. 최은정은 수겸의 후배이자 민호와 동기였다. 그녀는 당시 수겸을 좋아했다. 과 내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드러내 놓고 수겸을 짝사랑했다. 수겸도 그녀에게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그가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랬던 은정이와도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고, 수겸은 다른 친구들보다 특히 더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수겸의 질문을 들은 민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수겸의 얼굴을 바라봤다. 민호의 표정은 놀란 듯도 보였고, 슬퍼 보이는 듯도 했으며, 화가 난 듯도 보였다.
“너 소식 못 들었구나?”
수겸은 영문을 모른 채 무슨 소식이냐고 민호에게 되물었다.
“은정이 죽었어.” 사실만을 전하는 간결하고도 메마른 그 문장을 전하는 민호의 낮은 목소리에는 어딘가 분명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 대답을 들은 수겸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농담을 들은 듯 했다. 하지만 농담일 리 없었다. 수겸은 민호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민호는 맥주잔을 들어 3분의 1쯤 남아있던 맥주를 천천히 한 번에 마셨다. 그리고 할 말을 정리하려 하는 듯 잠시 시간을 가진 뒤 은정이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은정이가 죽은 것은 3년 전이었다. 그해 여름에 그녀는 친구들과 울릉도로 여름휴가를 갔다. 어렸을 적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여행계를 들어 돈을 모아서 갔던 여행이었다. 울릉도에서 계획했던 일정들을 하나하나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드디어 가장 기대하던 일정이었던 어선을 빌려 타고 바다낚시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의 기상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다. 바람이 거셌고, 파도가 높았으며, 폭풍우도 예고됐었다. 기준대로 했다면 바다에 나가서는 안 될 날씨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꼭 해보고 싶다는 그들의 잘못된 고집과 돈에 욕심을 부린 선주의 빗나간 선택이 그들을 바다로 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작은 어선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전복되었고, 그녀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 실종되었다.
“그녀는 결국 시신을 찾지 못했어. 아마 해류에 휩쓸려 어딘가로 멀리 떠내려갔을 거라 하더라고. 그렇게 외롭게 먼바다를 떠돌아다니다가 서서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민호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마네키네코가 웃는 얼굴로 오른발을 흔들고 있었다.
“전혀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수겸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에 TV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몰랐구나. 하긴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세상인데 바다에서 실종된 사고 정도가 큰 이슈를 끌진 못했겠지.”
수겸은 시선을 돌려 통유리를 통해 완전히 어두워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두터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무심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화면을 통해 보는 무대 위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그리고 민호를 통해 듣게 된 은정이의 소식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저 무대 위의 사람들에 대한 얘기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수겸에게는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은정이는 시신을 못 찾아서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어. 부모님은 끝까지 은정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든. 그래서 아마 당시에 친구들에게 소식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알기론 사망신고를 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민호는 두 손으로 비어버린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수겸에게 시선을 옮겨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맥주 한잔 더 할래?” 수겸은 그러자고 답하고는 이미 미지근해져 버린 남은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둘은 새롭게 나온 맥주를 마시며 은정이에 관한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이제는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좋아했던, 그리고 자신도 분명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 관해 얘기하는 것에 수겸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있잖아.” 민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겸은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은정이를 좋아했어. 학교에 다닐 때부터 계속 말이야. 그리고 졸업한 이후에는 실제로 고백도 했었고.”
수겸은 민호에게 해 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은 무게를 상실하고 공중으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호는 수겸의 말을 딱히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담담하게 읊조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은정이가 너를 좋아했으니까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어. 그때 난 은정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어. 여자 친구도 있었던 널 말이야. 어쨌든 나는 은정이가 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어. 그래서 졸업 이후에 네가 우리와 멀어지고 은정이도 너에 대한 감정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난 은정이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어. 예전부터 계속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이야. 하지만 은정이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어.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눈물을 글썽거렸지. 그녀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그리고 그 고백 이후 몇 년 뒤에 은정이는 먼바다로 떠나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
식당 안은 분명 손님들의 대화 소리로 웅성거렸다. 하지만 수겸에게는 모든 소리가 음소거된 듯 적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적막함 속에서 민호의 작은 목소리가 너무나 뚜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수겸은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셨다. 민호도 역시 맥주잔을 들었다. 하지만 잔을 입까지 가져가기만 했을 뿐 마시지는 않은 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바깥을 향한 채 수겸에게 말했다.
“수겸아, 은정이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수겸은 기온이 몰라보게 포근해진 것을 느꼈다. 짙었던 겨울의 색은 더디지만 확실히 옅어지고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밖으로 뺐을 때 느껴지는 공기의 선선함이 수겸은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겨울이 지나가버리는 게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사람들로 빼곡한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수겸은 어젯밤 민호와의 만남을 다시 떠올렸다. 은정이에 대해 말하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듯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그리움이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수겸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과연 우리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지냈던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는 그저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갔고, 누군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끝없이 그리워하며 지냈다.
열차가 동호대교를 건너는 동안 창밖에는 다리의 교각 사이로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한강이 보였다. 그 짙은 색 물결은 수겸에게 은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먼바다 어디쯤을 혼자서 외롭게 여행하고 있을 은정이를. 그곳이 어딘지 수겸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한강을 건넌 열차는 어느새 다시 어두운 지하 터널로 진입하고 있었고, 수겸은 창밖으로 보이는 터널의 어둠을 보기 싫어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