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주간 단편

청보리밭의 남자

by 주얼



청보리가 바람에 크게 일렁이고 있다. 짙푸른 청보리의 물결은 언뜻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도 보인다. 거세게 부는 바람이 청보리밭에 휘몰아치고 있고, 청보리는 스스로도 그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하늘에는 저 멀리까지 어두운 회색의 구름이 겹겹이 펼쳐져 있다. 태풍이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곧 폭풍우로 돌변해 매섭게 몰아칠 것만 같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청보리밭의 저 끝에는 낮고 둥근 검은색 오름의 능선이 이어져 있다. 구름 가득한 하늘과 일렁이는 청보리밭 사이에서 오름은 그저 가만히, 그리고 묵묵히 마치 외로운 한 마리의 짐승처럼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고독하기도, 어떻게 보면 두렵게도 보이는 그 풍경 속에 그가 서 있다.

그는 뒤돌아선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사나운 바람은 그의 검은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고 있고, 낡아 보이는 회색빛 점퍼는 바람에 무력하게 펄럭이고 있다. 그는 양팔을 가지런하게 내린 상태로 미동도 없이 서있다. 하반신은 청보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뒤돌아서 있기에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람에 휩쓸려 쓰러져 있는 청보리인지, 아니면 말없이 엎드려 있는 낮은 오름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하늘인지는 그의 뒷모습만 보고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는 눈을 감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불어오는 바람이 전해주는 먼 과거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거친 바다와 들판, 어두운 숲과 골짜기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의 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보는 중일 수도 있다.

세찬 바람이 가득한 청보리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그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안해 보인다. 그의 뒷모습에서 눅눅한 쓸쓸함과 고단함이 느껴지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흔들리지만 꺾이지는 않는 청보리, 적막하지만 든든히 그 자리에 있는 오름, 어둡지만 포근한 하늘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분명 바람과 함께 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시련이자, 동시에 저 멀리 남쪽으로부터 희미한 희망의 기운을 전해주는 바람과 그는 함께 있다.

그렇게 그는 그림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젊은 시절 그는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지만, 항상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물감을 사기 위해 밥을 굶고, 빚을 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힘든 환경 속에서 그래도 하루하루를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그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도 피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시련이 찾아왔다. 붓을 든 손이 조금씩 떨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져 찾아간 병원에서 그는 그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생소한 병을 진단받았다. 그건 바로 루게릭병이었다. 운동신경세포가 점점 파괴되고, 결국 수년 내에 사망에 이르는 별다른 치료법도 없는 병이었다.

이대로 몇 년 뒤에 자신이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다. 어둡고 싸늘한 방의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 내면의 어두운 우물 아래로 침잠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다가 올 죽음을 차분히, 그리고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천천히 죽음을 준비하로 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더는 의미가 없었기에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제주도는 자신의 삶을 조용히 정리할 장소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할 장소로 찾아간 제주도에서 그는 그곳의 풍경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원시의 신비함을 간직한 제주도의 바다와 들판, 숲과 오름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바로 제주도의 바람이었다.

제주도의 매서운 바람은 거친 파도를 일으키고, 들판의 수풀 사이를 마구 휘젓고, 커다란 나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해녀들은 무자맥질을 했고, 꺾어지고 쓰러질 듯했던 초목은 금세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가 마주친 제주도의 바람은 시련이자 고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는 제주도의 풍경에, 그 풍경을 만들어 내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매혹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려야만 한다고 느꼈다. 제주도의 풍경을, 제주도의 바람을 화폭에 담는 것이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 신에게 부여받은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사진기를 들고 매일 자신이 머물던 집 근처의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시각각, 하루하루 변하는 풍경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끈기 있게 기다렸지만 원하는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들판의 청보리는 하루가 다르게 그 색이 짙어지며 바람에 흔들렸고, 구름은 아름답고 역동적으로 흘러갔지만 그가 원하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어느 날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풍경을 맞이하였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하늘 가득한 회색빛 구름과 바람에 휩쓸리고 쓰러진 청보리, 그리고 그 사이에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 오름. 바로 제주도의 자연과 바람이 만들어내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는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도 그 풍경을 함께 담았다.


그의 근육을 천천히 파괴시켜가던 병은 어느새 그가 붓을 드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집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바람이 제주도에게 시련이자 생명인 것처럼 제주도의 바람을 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그에겐 고통이자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이었다.

오랜 시간 끝에 그는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는 완성된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해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들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만이 들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제주도의 풍경이 꼭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거센 바람에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지만, 어느 순간 바람이 지나고 나면 다시 평화와 따스함이 찾아 올 그림 속의 풍경이 자신의 모습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오른손으로 힘겹게 붓을 들어 청보리밭의 한가운데에 한 사나이의 모습을, 바로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 넣었다. 주변의 풍경과, 그리고 바람과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캔버스의 우측 하단에 ‘청보리밭에서의 자화상’이라는 문구를 적고, 자신의 서명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마친 뒤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그림을 바라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분다. 청보리는 쓰러질 듯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다. 회색 하늘은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고, 곧 많은 비가 쏟아질 듯 공기 중엔 비 냄새가 가득하다. 광활한 청보리밭 너머 저 편의 낮은 오름은 그저 말없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과 함께 그가 서 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가 서 있다. 그는 그 속에서 더는 고통스럽거나 외롭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 안온하기만 하다. 그에게 다가온 거대한 시련은 이제 고요한 평안함으로 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그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다.

가만히 풍경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회색 하늘과 청보리와 오름이 만나는 그림 속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짙은 구름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그 지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간다.

그렇게 그는 바람 속을 걸어간다.




*제주도를 사진에 담았던 김영갑(1957~2005) 사진작가님의 생애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지막 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