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설계실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아이팟 클래식에 연결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책을 훑어보고 있던 수겸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치며 불렀다. 수겸이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어보니 그를 보며 싱긋 웃고 있는 은정이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설계실에는 웬일이에요?” 은정은 기분이 좋은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오전 교양수업이 있었는데 휴강됐어. 교수님 부모님이 상을 당하셨대. 그래서 오전 시간이 비었는데,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수겸은 대답을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차림새에 눈길이 갔다. 그녀는 면 소재의 하얀색 미니 원피스에 베이지색의 카디건을 걸쳤고, 어깨에는 커다란 가죽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은 살짝 젖어있는 듯했고, 얼굴엔 평소에 안 하던 화장도 한 듯했다. 수겸은 오늘 그녀의 모습이 편안한 캐주얼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의 평소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랬구나. 뭐 보고 있었어요?” 수겸이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보내며 은정은 물었다. 수겸이 책을 덮어 보여준 양장으로 된 검은색 두꺼운 표지에는 ‘현대서양건축’이라는 제목이 하얀색 한자로 크게 적혀있었다.
“책 보고 있었어. 이제 슬슬 서양건축사 수업 발표 준비해야 하니까.”
“오빠, 누구였지?”
“미스.”
“맞다, 미스. 미스면 자료 많잖아. 준비하기 쉽겠네. 오빤 좋겠다. 난 그로피우스야. 바우하우스 말고는 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구요. 망했어, 정말.”
은정은 옆 책상의 빈 의자를 끌어와 수겸의 옆에 앉으며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수겸의 옆에 바짝 앉는 바람에 그녀의 하얀 무릎이 수겸의 허벅지에 닿았다. 수겸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간 그녀의 허벅지에서 얼른 눈을 떼고 의자의 가장자리로 살짝 이동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자료가 많으면 정리하기가 더 어려워. 오히려 정리할 게 적으면 단순하고 더 좋지.” 수겸은 책을 집어 들어 책상 위 선반에 꽂으며 말했다.
“에이,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오빠 그러면 나랑 발표 주제 바꿀래요? 정리하기 더 쉽다면서요. 바꾸자아.” 은정은 수겸의 오른팔을 양손으로 잡고 조르듯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수겸은 은정의 눈길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이미 다 결정된 걸 어떻게 바꿔. 교수님한테 혼나 그럼.”
“칫, 거봐. 자기도 그로피우스는 하기 싫은 거면서.”
은정은 잡고 있던 수겸의 오른팔을 퉁명스럽게 살짝 밀어내었다. 수겸은 아무 말없이 미소만 짓고는 아이팟을 끈 뒤 이어폰을 뽑아 꼬이지 않게 둥글게 감았다. 그리고 은정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은 오전에 전공 수업도 없는데.”
“웬일이긴, 오빠가 있을 줄 알고 보러 왔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은정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겸은 그녀의 대답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매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은정의 말에 수겸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뭐라는 거야. 장난치지 마.”
은정은 당황한 수겸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작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아이팟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뭐 듣고 있었어요?” 액정화면에는 수겸이 듣고 있던 노래의 앨범커버 이미지와 곡명 등이 표시되었다.
“언니네 이발관? 2002년의 시간들? 무슨 노래예요? 처음 들어보는데.”
“언니네 이발관이라고, 그래도 나름 꽤 유명한 인디밴드인데. 모르니?”
“언니네 이발관... 음...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들어보면 알려나? 나 한번 들어볼래요.”
은정은 수겸이 들고 있던 이어폰을 가리키며 달라고 했다. 수겸은 아이팟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은정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매번 먼저 말을 걸어줄 때마다, 그리고 조금은 짓궂기도 한 장난을 칠 때마다 수겸은 분명 즐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없었기에 그녀가 그럴 때마다 수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살짝 머뭇거리다가 이어폰을 은정에게 건네려는 순간, 두 사람의 뒤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최은정. 또 수겸이 괴롭히고 있구나.”
민호였다. 그는 수겸의 자리가 있는 공간을 둘러싼 파티션 뒤편에 서 있었다. 파티션 위에 양팔을 올리고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목에는 수건이 걸려있었고, 피곤한 듯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깜짝이야. 안녕, 민호 오빠.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최은정 니 목소리 때문에 깼다. 어찌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지.”
“형, 설마 어제도 설계실에서 밤샌 거예요?”
“흐아암.” 민호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소리를 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냥 뭐 이것저것 하며 놀았지. 쓸데없이.”
민호는 누구나 인정하는 건축과의 에이스였다. 실력도 좋았지만, 워낙 열심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설계실에서 밤새 건축 관련 책을 읽거나 설계 작업을 하는 경우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잦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집이 멀기 때문에 아침 일찍 나오기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그는 말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는 걸 건축과의 모든 학생은 알고 있었다.
“오빠, 집에 좀 들어가서 자고, 제발 깔끔하게 씻고 다니고 그래요. 왜 멀쩡하게 잘생긴 사람이 그러고 다녀. 어휴, 아저씨처럼.” 은정은 웃는 표정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민호에게 말했다. 민호는 팔짱 꼈던 손을 풀고 목에 걸린 수건의 양 끝을 손으로 잡은 채 말했다.
“안 그래도 이제 씻으러 갈 거야. 씻고 와서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형 아직 열한 시도 안 됐어요.”
“배고프면 먹는 거지 시간이 뭐가 중요하니.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 금방 씻고 올게. 그리고, 야 최은정, 수겸이 옆에서 좀 떨어져라. 수겸이 엉덩이가 의자에 반만 걸쳐있네. 조금만 더 가면 떨어지겠다.”
“아이 정말, 이름 부를 때 성 좀 붙이지 말아요. 정 없어 보이게 자꾸 성을 붙여. 그리고 좋아하니까 붙어 있는 건데 뭐 어때.”
은정의 대답에 민호는 아주 잠깐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젓고는 이내 다시 크게 하품을 하며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수겸은 괜히 혼자 어색해져서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책상 옆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어 앞주머니를 열었다.
“슬슬 우리도 일어날 준비를 하자. 그거 줄래?” 수겸은 은정이 들고 있는 아이팟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 노래 들어보고 싶었는데.” 은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내리며 수겸에게 아이팟을 건넸다. 수겸은 이어폰과 함께 그것을 가방에 넣은 뒤 주머니를 닫고 일어나며 말했다.
“나중에 들려줄게. 들으면 너도 분명 마음에 들어할 거야. 이제 일어나자.”
대부분의 식당이 점심을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인 것 같아, 셋은 지하철역 근처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바깥 날씨는 말 그대로 완벽한 가을 날씨였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하늘은 선명하게 파랗고 투명했으며, 생크림 같은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햇볕은 따사로웠고, 부드러운 미풍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에는 노란 단풍이 완연하게 물든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아래로 민호와 은정이 나란히 앞서갔고, 수겸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민호와 은정은 지난번 설계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에 관해 얘기하며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은정이가 자신의 설계 컨셉을 설명하면 민호가 장난 섞인 비판을 했고, 은정은 이에 지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흡사 톰과 제리처럼 아옹다옹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수겸은 만약 둘이 사귄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보다 서로 친하기도 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사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은정이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수겸은 또다시 자신을 향한 은정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군 휴학을 마치고 올해 3학년으로 복학한 수겸은 3년 만에 다시 하게 된 학과 생활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와 친했던 동기들은 모두 그보다 1년 먼저 복학해 이미 4학년이 되어 있었고, 전공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들은 모두 자신보다 최소 두 학번 아래의 후배들이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성격의 수겸에게는 맞선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조금 외롭더라도 후배들과 친해지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수겸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이 바로 민호였다. 학번은 아래였지만 학교에 늦게 들어와 나이는 수렴보다 많았던 민호는 특유의 붙임성으로 수겸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수겸은 학과 생활에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고, 어느새 민호와는 항상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민호와 동기이고, 서로 친했던 은정이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렇게 셋이 친하게 지내던 중 어느 순간부터 은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수겸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수겸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1학기가 끝나갈 무렵 학과 내에는 ‘최은정이 정수겸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공식적인 사실처럼 여겨졌다.
수겸은 당혹스러웠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군대에 가기 전부터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은정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겸에게 직접 좋아한다거나 사귀자는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때때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가볍게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지 진지하거나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단둘이 있을 때는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겸은 혼란스러웠고,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게 진심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녀가 진지하게 고백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수렴에게 큰 고민이었다. 은정은 분명 예쁘고 매력적인 아이였지만, 수겸은 여자 친구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은정이가 고백을 한다면 자신은 그 고백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서로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가 될 게 뻔했다. 수겸은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부디 은정이가 자신에게 그저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최은정, 근데 너 오늘 평소와 조금 다르다. 화장도 한 것 같고. 무슨 일 있냐?”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먹고는 민호가 우물거리며 은정에게 물었다. 아직 점심시간 이전이라 가게 안은 한산 했다. 그들은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쏟아지는 햇살에 은정의 하얀 원피스가 더욱더 새하얗게 빛났다.
“아, 또! 이름 부를 때 성 좀 붙이지 말라니깐요. 안 친한 사이 같잖아.” 은정은 장난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감자튀김을 쟁반에 던지며 발끈했다. 민호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와 다르긴 뭐가 달라. 내가 평소엔 뭐 어떻게 하고 다녔다고. 나 오늘 좀 달라요, 오빠?”
은정이가 수겸을 향해 양팔을 펼쳐 들며 물었다. 수겸은 오늘 은정이의 모습이 확실히 평소보다 더 이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왠지 부끄러워 건너편에 앉은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평소와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라고 말하고는 서두르듯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셨다. 얼굴도 왠지 붉어진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에이, 뭐야 그게.” 은정은 살짝 김 빠진 듯이 반응했다.
“다들 오늘 시간 어때? 오랜만에 노천극장에 앉아서 술 한잔할까? 날씨 죽이잖아.” 옆자리의 은정을 슬쩍 본 뒤 민호가 반쯤 먹은 햄버거 포장지를 천천히 정리하며 수겸과 은정에게 물었다. 지나가던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쨍하게 들어오던 햇살이 가려지며 가게 안이 살짝 어두워졌다.
“난 괜찮아요. 오후에 교양수업이 5시 반에 끝나니까 그 이후면 상관없어요.” 수겸이 대답했다.
“난 오늘 안돼요. 약속 있어.” 은정은 새침하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둘이서 마셔요.”
“그래? 그럼 오늘은 둘이서 보자, 수겸아. 은정이는 역시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우리랑은 있기 싫은가 봐.”
“흥, 두 분이 오붓하게 재밌게 드세요. 내가 오늘 기회를 줄게.” 냅킨을 들어 입술을 가볍게 닦은 뒤 은정은 수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후엔 무슨 수업이에요?”
“현대문학의 이해.”
“현대문학의 이해? 뭘 배우는 수업이에요?”
“서양 소설 사조의 흐름, 그리고 대표적인 작가 및 소설, 뭐 그런 것들. 소포클레스부터 세르반테스, 발자크, 에드거 앨런 포,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등등.”
“재밌어요? 어려울 것 같은데.”
“재밌어. 이번 학기 듣는 수업 중에선 제일 마음에 드는 수업이야.”
“오빠하고 어울리는 수업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문학소년 같은 이미지야. 그렇지 않아요?” 은정은 신기하다는 듯 수겸을 바라보며 민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햇살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민호는 눈이 부시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수겸은 자신에 관해 얘기하는 게 어색해 애매한 미소를 짓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지하철이 지나갔는지 출구에서 많은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출구 앞 작은 광장에서 부지런히 땅을 쪼고 있던 비둘기들은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은 햇살에 유려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광장 앞 플라타너스의 잎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12시가 다가오면서 가게 안은 빠르게 사람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수겸은 말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고, 은정은 그런 수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으며, 민호는 천천히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수겸과 은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후 교양수업이 끝난 뒤 설계실로 가던 수겸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는 왠지 모르게 지쳐있었다. 세 시간을 완전히 채운 수업이 힘들기도 했고, 오늘 배운 발자크와 그의 소설 <사라진느>가 그에게 익숙한 작가와 작품이 아니라 조금 지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겸은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민호와의 저녁 약속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몸이 지쳐있어서인지 그 약속이 조금 귀찮게 느껴졌다. 만나면 분명 재밌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술이 그렇게 마시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수겸은 민호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다음에 한잔하자고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형, 미안한데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술은 다음에 마셔요. 정말 미안해요.
메시지를 보낸 뒤 민호로부터 답문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 답은 오지 않았다. 결국,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수겸은 그냥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벤치에서 일어나 학교 정문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은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고, 수겸은 그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 자신이 탑승할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뒤 온 버스에 올라탄 수겸은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여자 친구에게 집에 간다고 메시지를 보냈고, 한창 취업준비 중인 여자 친구는 자신은 도서관에서 조금 더 공부하고 갈 거라는 답을 보내왔다. 여자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한 뒤 수겸은 가방에서 아이팟과 이어폰을 꺼냈다. 노래를 들으며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민호 형인가’라고 생각하며 열어본 휴대폰의 액정에 뜬 발신자 이름은 뜻밖에도 은정이었다.
오빠, 지금 민호 오빠랑 술 마시는 중이에요?
‘약속이 취소돼서 합류하려 하는 건가?’ 수겸은 은정이가 메시지를 왜 보낸 건지 궁금해하며 오늘 모임은 취소됐고, 자신은 지금 집에 가는 중이라고 답을 보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안 돼 바로 답이 왔다.
지금 어디쯤이에요? 난 지금 종로 쪽에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잠깐 올 수 있어요? 아니면 내가 오빠 편한 곳으로 가도 괜찮고.
은정의 메시지를 읽은 수겸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은 설레는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단,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어떤 슬픈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 때문이라는 걸 수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예감이 현실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은정에게 거절의 답문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곧 수겸은 자신이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은정이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에 더 강하게 이끌렸다. 결국 수겸은 은정에게 자신이 종로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여자 친구에게는 갑자기 민호 형에게 연락이 와 만나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수겸은 여자 친구에게, 그리고 민호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으며, 되돌리고픈 마음도 없었다. 수겸은 아이팟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이고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은정은 종로3가역 14번 출구 근처에 서 있었다. 오전과는 다르게 머리는 뒤로 묶고 있었고, 해가 질 무렵의 부드러운 햇살에 얼굴은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은 왜 취소된 거예요?”
“그냥. 조금 피곤하기도 했고.” 수겸은 얼버무렸다. 은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좀 걷고 싶었는데, 혼자 걷기는 싫고 그래서. 괜찮죠? 좀 걷는 거.”
은정은 수겸에게 함께 걷자고 했고, 둘은 청계천으로 내려가 종각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거리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고, 바람의 온도는 부쩍 낮아져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수겸은 은정을 향해 물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걷고 있던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수겸을 바라보았다.
“오빠, 수영 좋아해요?”
“수영? 어렸을 때 배우긴 했는데, 딱히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아. 그냥 부모님이 시켜서 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수영은 왜?”
“나 요즘 수영 배우거든요. 배운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어요. 일주일에 세 번, 아침 9시에 학교 근처 수영장에서. 실은 오늘 아침에도 수영장에 다녀온 거였어요.” 은정은 가방에서 수영용품이 들어있는 작은 비닐백을 살짝 꺼내 수겸에게 보여주고는 이내 다시 넣었다.
평일 저녁이었지만 청계천에는 가을밤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로 주변은 소란했고, 수겸은 은정의 얘기에 좀 더 집중했다.
“수영을 배우니까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요?”
“글쎄, 아무래도 건강해지는 거?”
수겸의 대답에 은정은 웃었다.
“그것도 좋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점은, 물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 내 호흡과 팔다리의 움직임에만 온전히 집중해야 되니까요. 그러지 않으면 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서 금방 숨이 차거든요.” 은정은 마치 수영을 하는 것처럼 숨을 짧게 들이쉬고,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호흡을 할 때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아래위로 들썩였다.
“난 그 순간이 좋아요. 물속에서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오로지 숨을 쉬고 내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요새는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다른 생각이 안 들도록?”
“응,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날 힘들지 않게 하도록.”
수겸은 조금은 슬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은정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
순간 은정은 자리에 멈춰 섰다. 수겸도 그녀를 따라 멈췄고, 그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우리 잠깐 여기 앉을래요?” 은정은 물가에 놓인 큰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당한 바위를 찾았고, 은정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가 바위 위로 이동하는 것을 도왔다. 둘은 바위 위에 앉았고, 수겸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은정에게 치마 위에 덮으라고 건넸다. 은정은 그 외투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건네받고는 자신의 무릎 위로 덮었다.
“사실 나 오늘 소개팅했어요.”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조금은 건조한 목소리로 은정은 말했다. 수겸은 살짝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물가의 수풀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은정은 팔짱을 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사람이었어요. 친한 언니가 소개해 준 사람인데,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 번만 만나보라고. 그렇게 내키진 않았지만 소개해 준 언니의 성의도 무시할 수 없어서 나갔죠. 언니 말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인상도 좋았고, 대화를 길게 해보지 않아도 선한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는. 그런데, 그런데 난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은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생각하려는 듯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수겸이 은정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은정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 두려운 듯 말을 주저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치 잘못한 행동을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는데도 계속 오빠 생각이 났거든요. 인사를 하고, 각자 소개를 하고, 차를 마시고, 웃으며 대화하는 중에도 이상하게 머릿속은 오빠 생각으로만 가득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난 정말 죄송하지만 안 되겠다며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카페에서 나와 버렸어요. 그 사람의 웃는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가 그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괴롭고 힘들었거든.” 말을 마친 은정은 팔짱을 풀고 자신의 왼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오른손 끝으로 왼 손바닥의 손금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건 마치 손금에 새겨진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 읽어내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은정의 얘기는 수겸의 가슴을 다시 두근거리게 했다. 아니길 바랐던 자신의 예감이 결국 현실이 된 것에 그는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은정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난 계속 혼란스러웠어.” 흐르는 물결에 시선을 둔 채 수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의 진심이 무엇인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어. 너의 그 말들이 진심일까 봐. 그래서 아니길 바랐어. 정말로 그냥 장난이길 바랐어.” 수겸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두근거리던 그의 가슴은 이제 마무 쿵쾅거리고 있었고, 혹시나 은정이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진 않을까 걱정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수겸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에게는 아직 은정에게 해 줄 가장 중요한 말이 남아있었다.
“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난 네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
어딘가에서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가을밤의 청량한 공기 중으로 잘게 부서져 흩어져 버렸다.
“알아요 오빠의 마음.” 은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소에 장난처럼 말했지만, 나 오빠를 정말 좋아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빠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오빠의 모습 하나하나가 내 눈에 계속 들어왔어요. 마치 외로운 걸 즐기는 것처럼 항상 혼자 있고, 차분한 목소리로 무심한 듯이 말하고, 그리고 언제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까지. 별 것 아닌 그런 것들이 그냥 좋았어요. 바보같이.” 살짝 서늘해진 기온 탓인지 은정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오빠가 날 많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거, 그리고 지금 여자친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러면 안되는데도 사람들에게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을 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좋아하는 감정을 안으로만 꼭꼭 감추고 있으면, 그 감정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요. 마치 깊은 늪에 빠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던 거예요.”
수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당한 단어로, 문장으로 도저히 정리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음악이 너무 듣고 싶어 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은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란 거 알아요. 오빠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미안해요.”
“아니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수겸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뭔가 더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도 분명 싫은 건 아니었다고, 그저 조금 혼란스러웠다고, 그리고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입 안에서 맴돌던 그 문장들은 결국 수련의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질 못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오빠. 나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수영을 하지 않아도 오빠 생각을 안 할 수 있도록. 그러니 그때까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도시는 투명한 어둠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길가의 가로등과 높은 빌딩들은 그 속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청계천의 미끈한 수면에 반사되어 산란된 빛은 수겸과 은정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희미한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흐르는 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주위에 가득했다.
“나 수영을 조금 더 배워서 익숙해지면 스쿠버다이빙을 해보려 해요.” 손을 맞잡은 채 흘러가는 물의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던 은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같이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그러는데, 스쿠버다이빙을 하면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자신의 호흡소리만 들린대요.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음에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자신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에만 귀 기울일 수 있다나 봐요. 그리고 그 순간 마음이 정말 차분해진다고.” 은정은 시선을 천천히 들어 밤하늘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시선을 수겸에게 옮기며 말했다.
“언젠가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그 순간을 상상해요. 수면 아래에서 바깥 세계와는 단절된 채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며 내 호흡소리만을 듣고, 내 안의 평안만을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을.”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 청계천의 산책로에는 이제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 그들은 모두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가을밤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어디선가 거리 음악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은정의 말을 들은 수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가방 앞주머니를 열어 아이팟과 이어폰을 꺼냈다.
“나는 그러고 싶을 때면 보통 음악을 들어.” 수겸은 아이팟에 이어폰을 결합하고는 한쪽 이어폰을 은정에게 건네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아까 못 들었던 노래 지금 들어볼래? 언니네 이발관.”
고개를 돌려 수겸의 얼굴을 바라보는 은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건네받은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꽂았고, 수겸도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에서는 ‘2002년의 시간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산책로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노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