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볼일이 있어 잠실을 방문했다가 시간에 여유가 있어 석촌호수에 들렀다. 벚꽃이 만개한 석촌호수엔 평일 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고, 호수 주변을 도는 산책길은 인명사고를 대비해 한 방향 통행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덕분에 거대한 인파의 무리가 일제히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꽤 재미난 풍경을 목격하기도 했다.(물론 나도 함께 돌았다.)
벚꽃이 만발하는 시기가 되면 수많은 사람이 더 화사하고 예쁜 벚꽃 명소를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엔 여의도나 석촌호수, 어린이대공원, 고궁 같은 익히 알려진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알려지지 않은’, ‘나만 알고 싶은’ 벚꽃뷰 명소에서 찍은 인생샷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서늘하고 쓸쓸한 겨울의 풍경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따듯하고 다정한 봄의 풍경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동네 곳곳에도 벚나무가 대단히 많다. 성북천 주변이나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정릉역으로 이어지는 아리랑로에는 가로수로 벚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그 어떤 명소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어 낸다. 벚나무는 아파트 단지에도 조경수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지 내에 멋진 벚꽃 정원을 가진 아파트에 사는 건 조금 부럽기도 하다.
약 한 달 전부터 운동을 시작해 동네 체육관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다니고 있다. 체육관에 가려면 아파트 단지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길 양옆으로 벚나무가 몇 그루 있다. 4월 초에 그 길을 지나갈 때 그중 한 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유독 빨리 꽃을 피운 걸 보았다. 다른 나무들은 이제 막 꽃망울이 부풀기 시작했는데 그 나무만 홀로 꽃망울이 터져 연분홍 꽃잎을 드러내었다. 아마 다른 나무들에 비해 햇빛을 더 잘 받았거나, 영양 공급이 좋아 생장 리듬이 빠른 나무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나무는 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다른 나무들의 꽃이 만개했을 땐 이미 꽃은 대부분 지고 초록색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제 운동가는 길에 다시 본 그 나무는 연초록 잎이 가득한 완전히 푸르른 나무였다. 주변의 나무들이 그래도 아직 얼마간 남은 꽃잎을 붙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먼저 핀 꽃은─당연히─먼저 졌다. 그 나무를 보면서 남들과 다르게 앞서 나간 저 나무의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보았다. 때를 맞추지 못하고 너무 이른 봄을 외롭게 맞이해 정작 완연한 봄이 왔을 땐 자신의 절정을 이미 지나버려 슬퍼하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계절의 선두에 서서 사람들의 이목을 누구보다 먼저 끈 것에 은근히 기분 좋아하고 있을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은 어쩌면 그저─하찮을지도 모를─인간 중심의 관점일 뿐인 것 같다. 그 나무는 빠르다는 건 상관없이 그저 자연의 시간을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다. 때가 되었을 때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초록 잎을 돋아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엔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이 오로지 해야 할 일을 해내었다는 성취감과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난 원래부터 선두에 서서 앞서 나갈 성격도 안되고 능력도 없기에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서, 크게 뒤처지지만 말자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점점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자주 의심하게 된다. 먼저 꽃을 피우기는커녕 아예 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퇴사 후 전업 작가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어들고 손에 잡히는 성과 없이 대부분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마인드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걱정과 우울감에 한 번 빠지면 한없이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가의 벚나무가 도움을 준 건지도 모르겠다. 주변보다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최선을 다하라고. 그러면 너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싱그러운 초록 잎이 울창해질 거라고.
아이고, 하찮은 나는 또 그저 가만히 있는 벚나무를 보며 멋대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쨌든 요즘 혼자서 마음을 다잡느라 끙끙거리고 있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끔 해준 벚나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고마워, 벚나무야.
_2024.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