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과 만나 시간의 흐름에 관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벌써 4월도 다 갔네요, 라는 넋두리 같은 말로 시작한 대화는 (꽃구경도 제대로 못 했는데) 봄도 벌써 끝났네요, (지겹도록 일하는) 하루하루는 긴데 한 달은 왜 이리 짧은 거죠, (계획한 것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가요, 까지 뻔한 레퍼토리 같은 푸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문장으로 옮겨놓고 보니 왠지 모르게 한심하게 느껴져 앞으로 저런 대화는 하지 말아야지 다짐해본다. 하지만 다음 달이 끝나갈 때쯤 되면 분명히 또 그러겠지. 벌써 5월도 다 갔네요, 주저리주저리.
달력을 보다가 문득 딱 1년 전에 세 번째 작품집이 나왔던 걸 떠올렸다. 책 마지막 장을 펼쳐서 발행일을 확인해보니 작년 4월 28일이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긴 했지만 아마 출간하기 직전이니 작년 4월 한 달은 정말 정신없었을 것이다. 책 출간 직후인 5월도 분명 바빴을 테고. 그러고 보면 내가 다녔던 회사는 1년 중 4, 5월과 10, 11월이 가장 바빴는데, 그 시기에 정확히 맞춰 책을 출간한 거 보면 나란 놈도 적잖이 어리석고 대책 없지 않았나 싶다.
세 번째 작품집은 공을 정말 많이 들였던 게 기억이 난다. 물론 그전에 발표한 작품들도 모두 다 아끼고 공들인 작품이지만, 세 번째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은 내게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나의 테마를 공유하면서 배경과 인물이 연결되는 네 편의 연작소설로 구상한 것은 기존까지의 내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굉장히 긴 호흡으로 소설을 썼고,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입했다. 그리고 네 편을 모두 완성했을 때 난 새로운 도전의 결과물에 만족스러워했다. 한 단계 성장했다고 믿었고, 분명 전보다 독자들의 반응도 좋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반응은 시원찮았다. 아니, 판매량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그래 봤자 도토리 키 재기다.) 단지 내 기대가 높았기에 그만큼 실망도 더 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독자들은 생각 안 하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며 소설을 썼던 것 아닌가 싶다.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구성과 형태에 도전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정작 독자들은 어떤 소설을 읽는지, 어떤 소설에 흥미를 보이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세계에, 나의 소설가로서의 성장에 몰두했다.
이렇게 한 번 실패를 경험했으니 정신 차리고 독자들에게 읽힐만한 소설을 써야 할 텐데 난 이번에도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간 독자들이 내 소설에서 좋아해 줬던 세밀한 감정 묘사와 서정적인 분위기는 버리고 완전히 결이 다른 초현실적이고 어두운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도 과연 잘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고집스럽게 매달려 어찌어찌 네 편을 써냈다.
쓰긴 썼는데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어쩔 수 없이 내 소설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고 생소했다. 과연 이 소설들이 독자들에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걱정되고, 그래서 불안했다. 세 번째 소설집을 작업할 땐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있었는데, 한 번 경험해서인지 이번엔 선뜻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불안과 의심은 최근 4월 한 달간 매달려 초고를 완성한 다섯 번째 소설에 반영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작가인데 심적으로 힘들고 방황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다 개인적인 이유로 방문한 에든버러에서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주인공은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이 환상이냐고 묻는다. 고개를 갸웃한 그녀는 초승달처럼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받아들이면 돼요.”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자신의 이야기가 되니까.”
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도 나의 이야기라고. 익숙하진 않겠지만 결국 이것도 주얼이란 작가의 소설이라고. 그러니 받아들이라고. 혼자만의 정신승리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많이 팔리는 것을 목적으로 소설을 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것을 목적으로 했어도 이루어지진 않았겠지만, 그것보단 내가 좋아하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이번 소설들도 나조차 낯설지만 결국 내가 원했기에 쓴 소설들이다. 물론 독자들의 선택은 냉정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난 또 좌절하고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뻔히 알면서도 저지르고 마는걸. 다시 깨닫지만 나란 놈은, 적어도 소설을 쓸 때만큼은, 이토록 어리석고 대책 없는 놈이다.
4월은 이제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4월에 정신승리를 이루었으니, 5월 한 달 동안은 의심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고 조금 더 치열하게 작업을 해보려 한다. 그래서 5월이 끝나갈 때쯤엔 ‘한 것도 없이’가 아닌, ‘그래도 뭣 좀 했더니’ 시간이 갔네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_2024.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