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서촌에서 열린 한 북페어 행사를 찾았다. 독립출판계에서 몇 안 되는 소설 쓰는 동료들이자 서로 의지가 되는 작가님들이 행사에 참여한다기에 만나러 간 거였다. 다들 경기도에 사셔서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서촌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행사가 마무리되는 6시에 맞춰 방문했다. 나도 참여를 신청했던 행사였는데 아쉽게도 선정은 안 됐다. 참여를 신청한 북페어에 떨어지면 내가 뭔가 부족해서 그런가, 내 작품들이 별로여서 그런가, 라는 자격지심을 매번 느끼게 된다.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아니라고 믿고 있다―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행사장에서 작가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사람은 많이 왔는지, 책은 많이 파셨는지 물었는데 작가님들 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게 성황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 얘길 들으니 또 선정되지 않은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럴 때 보면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행사 정리를 마친 작가님들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서촌 거리를 걸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던 4월의 토요일 오후인지라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았는데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쪽갈비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도 우리가 자리를 잡은 뒤 곧 만석이 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금세 길게 늘어섰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서울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작가님들과 맛있는 식사와 함께 한두 잔 술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던 우리는 어느 순간 창작의 고통과 어려움을 두서없이 토로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쓰게 만드는 소설을 향한 우리들의 외사랑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백했다. 상대방의 어려움과 즐거움이 진심으로 이해되고 공유되는 사이, 그래서 누구보다 속 깊은 위로와 응원을 건넬 수 있는 사이. 독립출판계에서도 소수 장르인 소설을 쓰는 외롭고 고독한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멈추지 않게, 또 주저앉지 않게 지지해 주고 지탱해 준다. 내게 있어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식사를 마치고 장소를 옮겨 계속된 술자리에도 우리의 얘기는 끊임이 없었다. 소설 쓰는 게 너무 어려워 관련 클래스를 수강 신청했다는 어느 작가님의 말엔 모두가 잘 한 결정이라고 북돋아 주기도 하고, 최근 발표된 한 작가의 신작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어느 작가님의 말엔 너도나도 동의한다며 요즘 소설을 향한 조금 부끄러운, 어쩌면 시샘 섞인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사소하고 무의미하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중요하고 진지한 작가들의 수다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작가님 한 분이 전철 막차 시간에 맞춰 먼저 떠나고, 남은 작가님 한 분과 나는 이렇게 헤어지긴 아쉽다며 계속해서 술자리를 이어가기로 했다. 근처 바(bar)로 이동해 위스키를 마시던 우리는 흘러나오는 노래에 빠져들었고, 난 음악을 듣기에 더 좋은 곳이 있다며 작가님을 나의 단골 LP바로 데리고 갔다. 올해 초 장소를 이전한 그 LP바는 첫 방문이었는데, 공간은 더 넓어지고 깔끔한 새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지만 분위기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조도가 낮은 노란빛 전구, 선반 빼곡히 꽂힌 LP, 벽면 크게 걸린 짐 모리슨의 사진, 커다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건 여전히 그 공간을 지키고 계신 사장님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장소가 바뀌어도 한결같이 턴테이블 앞에서 음악을 틀어주고 계신 사장님이 너무나 반가웠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소심하고 낯가리는 성격의 내가 사장님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고 인사를 했을 정도다. 물론 술기운이 한몫했다.
작가님과 맥주를 홀짝이며 음악을 들었다. 여긴 음악 소리가 워낙 커 조용한 대화는 쉽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우린 이제 대화가 크게 필요치 않았다. 흘러나오는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음미하며, 신청한 곡이 나오면 반가워하며, 때로는 함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렇게 깊은 밤의 시간을 가만히 흘려보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오면 예전부터 종종 신청했던 노래가 있다. 넥스트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이날도 역시 이 곡을 신청했고, 노래가 흘러나오자 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노래엔 이런 가사가 반복된다.
아직 단 한 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어.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항상 너야.
오늘의 만남 때문이었을까. 이 가사가 나에겐 유독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난 옆자리의 작가님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작가님, 소설 쓰는 거 후회해요?”
작가님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그저 웃기만 한다. 난 짓궂은 걸 알면서도 다시 묻는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독립출판 또다시 하시겠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작가님은 잘 모르겠다고, 선택 안 할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만약 후회 안 한다고, 선택은 같다고 대답했어도 난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님의 대답이 나는 더 좋았고 그렇게 답해주셔서 감사했다. 나도, 그리고 오늘 만난 작가님들도 분명 글쓰기를 사랑하고, 소설을 사랑하고, 독립출판을 사랑한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미워하고 힘겨워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 순간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선택을 후회한다고 해도 비난할 순 없다. 오히려 박수를 건네고 등을 토닥일 것이다. 이미 그 선택을 했을 때부터 누구보다 멋졌으니까.
LP바를 나올 때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며 이 공간을 계속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언제든지 오라고 답해주셨다. 조금은 무뚝뚝한 사장님이시지만 대답과 함께 보여주신 미소가 분명 이렇게 말한 걸 알 수 있었다. 언제든지 와. 이 공간은 여전할 것이고, 노래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밖으로 나오자 새벽 2시의 공기는 너무나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대학로는 미처 잠들지 못한 젊음으로 분주했고 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모든 게 감사한 밤이었다. 날씨도, 음악도, 그리고 사람도. 심지어 이 시간에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나이트버스에게도.
_202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