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글쓰기 모임을 처음 시작했을 땐 에세이를 썼다. 2, 3회 정도 에세이를 쓰다가 안 되겠다 싶어 소설로 장르를 바꿨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부끄러워서였다. 엉망인 문장도 부끄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솔직한 내 생각과 감정, 일상을 쓴 글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게 영 자신 없었고 왠지 낯부끄러웠다. 그래서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쓴 소설이 백 퍼센트 허구는 아니었다. 많은 소설에서 나를 포함한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이 소재로 사용되었다. 단지 이를 변형하고 가공한 가상의 인물과 사건으로 구성되었기에 내 얘기인 듯 내 얘기가 아닌, 또는 내 지인 얘기인 듯 지인 얘기가 아닌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이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건 작가님 얘기인가요?” 또는 “아는 사람 얘기인가요?”이다. 처음엔 이런 질문에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제 얘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제 얘기는 아니고요, 제 얘기의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바꿔서……” 설명하는 나도, 듣는 독자도 모두 명쾌하지 못했다. 지금은 깔끔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대답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다. 시작은 나 또는 지인의 얘기였지만 수차례 변형과 가공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 허구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 됐든 당신(또는 지인)의 얘기가 시작 아닌가요?”라고 다시 묻는다면, 딱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뭐, 그렇긴 하죠, 라고 할 수밖에.
소설을 발표한 뒤 가장 신경 쓰이고, 궁금하고, 걱정되는 건 과연 내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고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이다. 내가 예상한 대로, 그리고 의도한 대로 독자에게 가닿아 어떤 울림을 주었다면 그것만큼 기쁘고 보람찬 일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소설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있다. 이런 분들의 감상은 내게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고, 내 소설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준 것에 감사하기도 하다. 물론 그 시각이 비판적이라면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지만.
독자들의 반응을 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이다. 그래서 자주(매우 자주) 온라인을 뒤적거린다. 그러다 내 소설 관련 게시물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 없다. 뭔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랄까. 감사하게도 대부분 호의적인 감상이지만, 때때로 비판적인(혹은 날카로운) 평도 있다. 얼마 전 발견한 한 게시물은 내 두 번째 소설집 『여름의 한가운데』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런 감상이 적혀 있었다.
'문장은 감성적이고 아름다우나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에 불쾌하고 불편한 지점이 많아서 아쉬웠다.'
기분이 나쁘거나 실망한 건 아니었다. 개인마다 감상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내 소설을 읽고 받을 수 있는 느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다만, 인물 설정과 스토리가 불쾌하고 불편했다는 말은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변형과 가공을 거쳐―반영되었다. 내게는 인상적이고 소중한 이야기들이기에 소설로 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게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어쩌면 소설을 읽을 당시 독자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에겐 의미 있고 소중한 경험(내 소설)이 개인의 어두운 기억과 연결되었을 수도 있으며, 내 소설 속 인물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에 신중함과 섬세함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지난 주말, 내가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는 작업 공간을 지역 주민들에게 공개하는 행사가 있었다. 단순히 공간만 공개하는 건 아니었고, 주민이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했다. 함께 입주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활동 분야에 맞게 영화와 시각 예술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소설 쓰는 작가인 나는 소설 말곤 보여줄 게 없기에 소설 속 몇몇 문장을 발췌해 전시하고, 그중 인상적인 문장을 선택해 감상을 나누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사전 신청을 받아 이틀간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는데, 둘째 날에는 초등학생 독서 모임의 회원들이 방문했다. 4, 5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을 보면서 처음엔 이 어린 친구들이 과연 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시작되니 아이들은 내 문장을 어른 못지않게 집중해서 보았고, 자신만의 판단에 따라 인상적인 문장을 선택했다. 특히 한 아이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아이가 선택한 문장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딸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속 문장이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 라고 말하는 문장이었는데 아이가 선택하기에는 그 감정이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지금 많이 아픈 데 아프기 전에는 말도 안 듣고 속만 썩였다고. 이 문장을 보니 지금이라도 엄마 말 잘 듣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했다고.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 마음에 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소설이, 내가 쓴 문장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과 색깔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고. 그렇게 다가간 문장이 그들의 과거와 현재, 추억, 감정과 만나 그들만의 풍경을 그리고 그들만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고.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난 더 겸허해진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다해 쓰자고 다짐한다. 독자들에게 다가간 내 소설은, 내 문장은 이미 내 것만이 아니기에.
_202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