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을 먹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옅은 구름이 드문드문 덮인 하늘과 비죽비죽 못나게 솟은 아파트, 그리고 멀리 보이는 시커먼 산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보이진 않지만 9월 중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가 창으로 보이는 그 모든 풍경을 숨 막히게 감싸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 습하고 무거운 바람,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여름의 공기. 분명 창밖은 아직, 여름이었다. 덕분에 부모님 집 거실의 오래된 에어컨은 추석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모두 모인 가족을 위해 신통치 않은 찬 바람을 힘겹게 토해냈다. 아끼고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여운 신념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선풍기에게 미룬 채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태평하게 잠만 잤을 녀석이 갑작스럽게 고생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단호하게 말한 것 같아 여름에게 조금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사계절 중 어떤 계절을 가장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다. 난 여름이 싫어요! (참고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물론 여름의 좋은 점도 있다. 일찍 뜨고 늦게 지는 태양, 파란 하늘에 피어오른 거대한 뭉게구름,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여름밤의 알 수 없는 낭만. 하지만 이 정도를 제외하면 좋아할 만한 점이 더 떠오르지 않는다. 여름은 그저 덥고, 습하고, 비도 많이 내리는 정말 견디기 쉽지 않은 계절일 뿐이다.
이렇게나 싫어하는 여름이지만, 이상하게도 소설의 소재로는 꽤 여러 번 사용했다. 내 첫 번째 소설집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에 1번으로 수록된 소설 제목은 「스물네 살 그해 여름」이다.(소설의 첫 문장은 무려 ‘거리는 이미 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다. 어이쿠!) 이 소설집에는「여름이 지나가고」라는 소설도 수록되었다. 두 번째 소설집의 제목은 심지어 『여름의 한가운데』이다. (동명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소설에서 여름이라는 시간은 마냥 푸릇푸릇하거나 상큼하거나 생기 넘치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무덥고 힘든 여름의 시간을 통과하며 방황하고 실패한다. 어쭙잖은 풋사랑은 쓰라린 상처를 남기고, 계속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저한 끝에 남은 건 텁텁하고 씁쓸한 후회뿐이다. 내게 여름이라는 계절은 이상하게도 그런 이미지였다. 괴롭고 험난한, 그래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하지만 피할 수는 없어 반드시 통과해 내야만 하는 시간.
사람의 일생을 계절로 나누어 본다면 여름은 아마도 이삼십 대일 것이다.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활기 넘치는 시기.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고, 모든 것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런 시기.(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여름에 관한 편견일지도) 그런데 나의 이삼십 대는 딱히 그렇지 못했다. 방황이 반복됐고,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에 더 익숙했다. 반짝이는 빛을 분주히 좇으려 했지만 두 발과 두 손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결국 어느 것 하나 손에 쥐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생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소설에 투영된 조금은 부정적인 여름의 이미지는 분명 이러한 나의 이삼십 대 시간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계절 중 가을은 가장 풍요롭고 충만한 시기이고, 인생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사십 대가 그러한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이지 않을까? 어느덧 내 나이도 앞자리가 4로 바뀐 지 두 해가 다 되어 간다. 내 또래의 친구들, 그리고 사회에서 알게 된 지인들은 이제 모두 자신만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뜨겁고 힘겨웠던 여름을 어떻게든 통과해 이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비옥한 양지에서 그동안 맺은 열매를 수확하며 안정적인 삶에 접어들고 있다.
반면, 나에게 가을은 아직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열매를 맺기는커녕 그동안 어찌어찌 일구었던 논밭을 모조리 갈아엎었다. 겪어본 적 없는 거칠고 메마른 토지에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있다. 과연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때가 되면 열매를 제대로 수확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마치 나 홀로 아직도 뜨거운 여름을 통과하고 있는 듯하다. 여름이 나에게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든다. 물론 그렇다고 억울하다거나 불만스럽다는 건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선택한 여름, 전업작가 생활이니 말이다. 쉽지 않을 걸,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난 스스로 뛰어들었다. 언제 끝날 지 모를 이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로.
창밖은 아직 여름이다.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가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그저 평소보다 조금 늦을 뿐이라는 것을. 나에게도 분명 가을이 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때까지 이 여름에 지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202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