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베테랑 2>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베테랑 2 봤어?”로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레 “어땠어?”로 넘어갔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극명하게 갈렸다. 누군가는 영화가 별로였다, 실망스럽다고 했고, 그에 맞서 다른 누군가는 너무 괜찮았다, 재밌게 봤다고 맞받아쳤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호(好) 세력과 불호(不好) 세력으로 정확히 이분되었다. 나는 호 세력이었다.
불호 세력은 이번 영화에서도 당연히 전편과 같은 스타일(단순하고 통쾌한 스토리, 호쾌한 액션과 웃음 등)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아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반대로 호 세력은 전편의 보장된 흥행 공식을 답습하지 않고 과감하게 차별화를 선택한 점에 박수를 보내며 만족감을 표했다. 양측의 입장은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논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애초에 누가 맞고 틀리고를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니까. 상대방의 의견이 어떻든 내가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가 중요하기에 피곤하게 핏대 세우며 목소리를 높일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화는 어느 순간 스리슬쩍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술자리 대화가 늘 그렇듯.
2015년 개봉한 영화 <베테랑>은 관객 1,3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흥행 대작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이러한 영화의 속편을 만들면서 전 편과 유사한 스타일로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흥행작의 후속작들이 대부분 그러한 방향으로 제작되곤 한다.(대표적으로 <범죄도시> 시리즈)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보다 깊이 있게 전달하기 위해 쉽고 안전할 수 있는 방향을 외면하고 변화와 도전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베테랑 2>는 전 편의 관객들에게 낯섦과 불편함을 안기는 다소 결이 다른 영화가 되었고, 명확하게 호불호가 나뉘는 영화가 되었다.(물론 그럼에도 흥행은 순조롭다)
아마 감독이 어느 방향을 선택했더라도 평가는 갈렸을 것이다. 전자의 방향을 선택했다면 ‘상업적 흥행만을 위한 고민 없는 자기 복제’ 따위의 말을 들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감독은 (내가 생각하기엔)충분히 설득력 있는 변화를 소신 있게 선택해 밀고 나갔지만, 그 변화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현 상황으로 충분히 드러났다.
어떤 분야든 창작이란 건―무언가 만들어 낸다는 건―그런 것 같다. 모두에게 환영받는 결과물을 내는 게 정말 어렵고 힘든, 정답이란 없는 행위. 9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 서태지는 1996년 그룹 해체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새로운 음반을 만들어 내는 창작의 작업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 한참 동안도 서태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창작이란 걸 해보지 않았으니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어설프게나마 창작 활동을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그때 서태지의 말이 십분 이해된다. 물론 서태지와 내 창작물의 수준은 비교할 바가 아니겠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창작할 때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건 많은 고민과 고통, 인내가 따른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는 작가가 일생을 통틀어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계속 변주를 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에 의하면 어쩌면 창작이란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것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작가가 탄생시킨 새로운 세계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더 깊게 또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창작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변주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날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베테랑 2>도 기존 <베테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 아닌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주한 작품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매번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분위기의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게 작가로서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전작들과 비슷해지곤 했다.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내용, 어떤 때는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소설들은 나름 의욕적으로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로 변화를 시도하였는데, 출간 전 먼저 읽어본 지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그냥 네 소설인데?”
난 나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변주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그저 똑같은 세계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던 것뿐인지도 모르겠다. 궁금하지만 스스로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의문은 지금 나에게 쓸데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난 그저 묵묵히 써야만 한다. 그게 창작이든, 변주든, 아니면 반복이든 중요하지 않다. 거미가 끊임없이 거미줄을 뽑아내듯 열심히 문장과 이야기를 생산해야 한다. 그렇게 나만의 더 크고 견고한 거미집을, 소설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독자들이 판단해 줄 것이다. 내가 만든 소설 세계의 형태가 창작인지, 변주인지, 아니면 반복인지 말이다.
_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