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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 Nov 11. 2024

40_불안과 사과



전업 작가를 시작한 이후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밀려드는 온갖 불안들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라는 근본적인 불안부터 시작해 내 소설을 사람들이 과연 좋아해 줄까, 내 책이 과연 팔릴까, 그리고 난 이 일을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 까지. 이런 불안들은 예고도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나 대응책은 없다. 불안에 맞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거나,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의지를 북돋우는 것 정도이다. 언뜻 보면 긍정적이고 씩씩한 태도 같지만, 사실 자신을 속이고 불안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것에 가깝다.


내가 지금까지 매주 한 편씩 썼던 글도 사실 불안을 감추고 외면하려는 방법 중 하나였다. 글 속에서 난 애써 괜찮은 척하며 해보자고, 가보자고, 믿어보자고 다짐하곤 했다. 물론 이러한 다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솔직하고 진실한 내 심정이자 의지였던 적도 분명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글을 쓰고 있을 때조차 내 마음속에는 어둡고 축축한 불안들이 가득했다는 걸 부끄럽지만 이제야 고백한다.


불안(不安)이란 '편안(安)'하지 '않은(不)' 것이다. 내가 전업 작가 생활을 하면서 불안을 느낀다는 건 결국 전업 작가 생활이 편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도 풀리지 않는 소설이, 소속이나 동료 없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하는 업무가, 고정적이지 않은 수익이, 그리고 하루하루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나를 편하지 않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편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어 불안에 점령당한 심신은 쉽게 지치고 흔들리며, 끝내 무너질 수도 있다. 최근 난 이를 몸소 체험했다.


지난주 대구에서 열린 북페어에서 알게 된 한 작가님은 방문객을 대상으로 열심히 자신을 어필했다. 자신이 어떤 책을 썼는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 등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신은 10년 동안 꾸준히 글을 쓰고 출판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말이었다.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기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작가님의 경력을 부러워하던 중 문득 10년 후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잠잠하던 마음속 불안이 고개를 들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불안하게 만든 건 10년 후 내 모습이, 그리고 내 활동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여전히 대다수가 모르는 소설을 쓰고, 판매량을 말하기엔 부끄러우며,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여러 북페어를 전전하는 초라한 무명작가의 생활을 10년이 지나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가슴은 두근거렸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행사를 마친 뒤 동행한 동료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두려움을 잠시 잊고 기분을 전환하려 했지만, 한번 불안해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새벽 난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끔찍한 가위에 눌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생전 처음 겪는 경험이었고, 이후 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잠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는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붕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불안을 해소해야 하고, 그러려면 앞서 언급한 날 편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을 없애야 한다. 내 생각에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작가로 성공하거나, 아니면 작가를 그만두거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가지 모두 무엇 하나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작가로 성공하는 건 너무나 요원하다(또한 내가 의지를 갖는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만둔다면 불안보다 더 괴로운 감정이 날 힘들게 할 것 같다.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불안과 함께 그저 버티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성공하거나 또는 포기하고 주저앉을 때까지.




얼마 전까지 작업실에서 함께 지냈던 감독님의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배우들끼리는 그런 얘기를 해. 우리는 입 벌리고 서서 사과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하염없이. 나에게도 사과가 오지 않을까? 내 옆 옆 사람이 그 사과를 가지고 가. 그리고 또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입술이 마를 때까지 입을 벌리고 그 나무 밑에서.”
_영화 <캐리어우먼> 중에서(황동욱 감독, 2022)


지금 내가 소설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건 어쩌면 언제 떨어질지 모를 사과를 가만히 기다리는 행위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내 모습이 누군가에겐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더 적극적으로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나무를 흔들지 않는 나를 보며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조금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이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불안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언젠가는 사과가 떨어질 거라 믿으며 불안의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다. 다리가 굳지 않도록, 입을 더 크게 벌릴 수 있도록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꿈틀대며. 내게 사과가 떨어졌을 때 놓치지 않고 꽉 붙잡기 위해.



_202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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