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특별한 습관이 있는데, 그건 바로 클래식 공연 관람이다. 공연의 프로그램은 항상 똑같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Choral)>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연말마다 공연장에서 이 곡을 들은 지 10년도 넘은 것 같다. 이제는 이 곡을 들어야지만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곡은 연말 클래식 공연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건 아마도 곡의 4악장 때문일 것이다. 4악장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들어봤을 유명한 멜로디로, 성악과 함께 곡의 제목처럼 대규모 합창단의 합창이 등장한다. 가사는 인류애와 형제애, 그리고 화합을 통한 환희를 노래하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에서 가져왔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대신 더욱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 기쁨!” 마치 1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한 해를 보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새로운 기분으로 희망을 노래하자는 것처럼 들린다. 연말에 잘 어울리는 메시지이다.
올해도 이제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2024년을 시작한 게 정말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어느덧 2025년을 앞두고 있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어떻게든 늦추고 싶고 되돌리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는 걸 한 해가 마무리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돌아보면 2024년은 여러모로 내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1년이 될 것 같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일은 과감하게 전업 작가의 삶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내 마음속엔 1년 내내 기쁨과 설렘,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격랑이 거세게 휘몰아쳤고, 그 어느 해보다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냈다. 어느 때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그러면서 나의 가능성과 한계를 깨달았다. 이리저리 수도 없이 부딪쳤고, 그러면서 금이 가거나 깨지기도 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버둥거렸고, 아마 앞으로도 오랜 시간 버둥거릴 것이다. 올 한 해 목표했던 것 모두 이루진 못했지만, 1년 가까이 전업 작가의 삶을 살면서 내가 이 삶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슬픈 일 때문이긴 하지만, 전업 작가의 삶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도 2024년은 절대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지난 8월 오랜 시간 바랐던 임신에 성공해 다가오는 2025년에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아빠의 삶을, 부모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태아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떻게든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한 뱃속 아이와 이별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여러 이별을 경험했지만 초음파 사진으로만 만났던 아이와의 이별은 어딘가 형태와 온도가 조금은 다른 슬픔을 내게 안겨주었다. 그 무엇보다 가까우면서도 낯선 존재와의 이별이었고, 그래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나도 놀랄 정도의 차가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별은 변화를 가져오고, 이별 전후의 난 미세하지만 분명 달라졌다. 아마도 그 달라진 차이만큼 벌어진,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의 틈 속에서 2024년의 쓰라림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시국을 보면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굉장히 답답하고 뒤숭숭한 연말 같기도 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력적인 비상식과 부조리가 우리가 사는 안온한 세계를 갑작스레 부수려 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했으며, 분노했다. 불의에 일어섰고, 어긋난 시대의 방향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따듯한 사랑과 행복, 웃음만이 가득해야 마땅한 이 시기가 다툼과 혼란으로 얼룩져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모두가 슬펐던 일, 화났던 일은 잠시 잊고 차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혼자보다는 가족과,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과, 혹은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과 함께이면 더 좋겠다. 비록 소박하더라도 따스하고 다정한 온기를 서로 나누며 기쁨과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끄럽고 날 선 소리는 잠시 끄고, 우리 모두 힘찬 목소리로 환희의 송가를 부르며 2024년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_2024.12.26
*저의 작은 희망이 무색하게도 오늘, 참담한 사고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