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퍼가 긁힌 채로 그냥 타고 다닌지가 벌써 몇 년인지 모르겠다. 동료들이 계속 탈 거면 칠이라도 좀 하고 다니라고 핀잔을 준 지도 오래지만, 자동차란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시하였다.
남편이 갑작스레 차를 보러 가자 하였다. 생각했던 차량이 주문해도 1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여 다른 것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대리점 영업사원이 주문취소로 재고가 한 대 생겼다고 하니 얼른 보러 가자는 거다.
그래 한 번 보기나 해 보자 하고 따라갔으나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도 새똥이 묻어도 내버려둔 채로 다니다가, 대리점에 전시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새차를 보니 뿌리칠 수가 없다. 게다가 인기 차종이라, 오늘 계약하지 않으면 아마도 하루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치 홈쇼핑 매진임박 같은 거다 생각하면서도, 언제라도 계약금을 환불받을 수 있다 하니 일단 선점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물었다. '돈 좀 있나?'
나는 당연히 없다. 계약서를 쓸 적에 내 명의로 하자 하더니, 나에게 차값을 달라 할 작정이었나 보다.
너무도 당당하게 '나 돈 없는데?' 하였더니, 내가 탈 차를 사는데 어떻게 그렇게 나몰라라 하느냐는 식이다.
나는 '지금 있는 차 계속 타도 되니 그럼 취소해' 하였다.
남편은 무엇이 그리 당황스러웠는지 딸에게까지 이야기하였다. 'S야, 엄마 차 사려는데 엄마가 돈이 하나도 없다 한다. 엄마 월급 받아서 안쓰고 다 머할라고 그러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맞벌이지만 각자 월급을 관리하고 있고, 차는 남편이 모두 관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차알못인 나는 그냥 주는 대로 타고 차에 대한 욕심도 없다. 그러니 지금 차가 오래되긴 했어도 큰 문제없이 잘 굴러가니 꼭 바꿔야 할 이유도 없는데다, 혹여 주차하다 벽을 긁어도 부담없고 사실 지금 차가 아주 편하다. 그러니 굳이 큰 돈을 들여 새로 차를 살 필요는 없다. 새차를 사자고 말한 사람이 차 살 돈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나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딸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엄마, 혹시 돈 모아서 나중에 우리 버리고 멀리 가버리려는 거 아니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19살이나 먹은 딸이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초딩같은 말을 내뱉고 있으니 나는 적잖이 황당하였다. 어이가 없어 웃었더니 왜 아니라고 대답을 안하냐고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다. 내가 혹시 그런 내색을 하였던가. 혹을 떼고 벗어나고 싶다는 나도 모르는 무의식을S가 읽은 것일까. 늘상 나는 아이들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아무런 장애물 없이 정말 혼자서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나의 소박한 월급의 대부분이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비로 나가는데, 내가 돈을 모아봐야 얼마나 모을 수 있으며, 그 돈을 모아 어디를 도망간다는 말이냐.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것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S가 내년에 스무살이고, C가 3년 후면 스무살이다. 그 때가 되면 둘 다 성인이 되니 나도 이제 훌훌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교육비와 생활비를 해결해 준다면 엄마 손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아빠만 남겨두고 나는 사라져도 되지 않을까.
'엄마!'
S의 외침에 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세계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듯 하였다. 에펠탑, 융프라우, 오로라, 우유니 소금사막이...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져버렸다.
'엄마, 아니지? 빨리 아니라고 말해'
7살 얼굴이 되버린 S에게 '당연히 아니지 무슨 소리야'
그제야 안심을 하는 딸이 몹시 사랑스럽고 또 몹시 미안하였다.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나 독립을 하고, 그 때 나는 온전히 자유를 즐길 수 있을까. 건강과 경제적 여유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자유도 행복도 아니라는 생각까지는 접어두어야겠다. 지금 나는 이렇게도 어여쁜 아이들이 곁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