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글처럼 하는 사람이 있다. 말을 할 때도 문장을 쓰듯이 고심해서 단어를 고르고, 그 단어들이 너무 아름답고 적확한 사람. 그의 말투는 문어체이고 음성은 마치 낭독 같다.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 그렇게 될까.
김혜리 기자는 그런 사람이다. 오래전 성시경의 <푸른 밤>에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가 영화를 소개하는 날이면 나는 본 적도 없는 영화를 내가 직접 본 것처럼 감상했고, 본 적이 있는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더 깊이 감상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그가 영화 <행복>에서 배우 임수정의 연기를 묘사하는데, 하교하던 길 팟캐스트로 듣다가 눈물이 핑 돌았던 적도 있다. 단순히 영화를 소개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온 영혼을 담은 듯했다.
그때부터 작가의 활동들을 눈여겨 지켜봤다. 영화 관련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관련해서 책도 몇 권 출간했다. 최근에는 <조용한 생활>이라는 팟캐스트를 매거진 형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김보라 감독, 정서경 작가, 그리고 정희진 여성운동가 등 귀한 게스트들의 보석 같은 인터뷰가 담겨 퀄리티가 여느 책 한 권 못지않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이 책은 김혜리 기자의 영화일기를 엮은 책이다. 한편 한편에 대한 해석과 묘사가 역시나 너무 좋았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도입부에 적힌 영화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에게 영화는 최악의 경우 오락거리에 그치고, 좀 더 나을 때 감정을 환기시키는 수준이라면, 그에게 영화는 또 다른 생애의 간접 체험이었다. 그 말은 그가 영화 속 인물을 그저 멀찍이서 관망하는 게 아니라 깊이 공감하고 내면화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바깥 세계와 나를 단절하고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으면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명이 떨어진 듯, 영사실 창에서 백광이 쏟아지고 하나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지만 앞에 썼든 딱히 나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영화 한 편 안에도 무수한 삶과 죽음이 있다. 12p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화묘사는 그림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홀로코스트 대비 스크린에서 비교적 상영빈도가 낮은 노예제 이슈는 묵직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때로 아름답고 때로 묵직한 글들의 묶음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글을 인용하자면 '특유의 실수 없는 섬세함을 발휘해 현재로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보여준다.
지브리 캐릭터들의 머리칼은 바람을 머금으면 기구처럼 부풀어 올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지만 호소다 마모루가 그린 인물의 머리칼은 미풍에 일렁이며 눈빛을 가려. 그는 덜 보여줌으로써 더 많이 이야기하는 종류의 연출자야. 사람이고 동물이고 이목구비를 대담히 생략하는 일이 흔하고 눈의 표정이 아예 보이지 않는 각도의 뒤쪽 측면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시점 숏도 많은데 이상하게도 감정의 진폭은 그런 순간 최고에 달하곤 해. 247p
다른 영화평론 글을 찾아 읽지 않아서 평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가 대중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방식은 너무나 섬세하고 탁월하다. 비교해 본 적 없지만 장담컨대 독보적이다. 신간 <묘사하는 마음>도 꼭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