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은 '예민하다'는 말로 은근하게 비난받는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이런 얘기는 "너 참 피곤하게 군다"와 같은 맥락이다. 하나의 성향이 다른 상황에서는 이런 뜻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섬세하다'라는 칭찬도 달갑지만은 않았다. 나 또한 다소 섬세하면서 동시에 예민한 기질에 속하는 사람이다. 말에 쉽게 상처받고 곱씹고 감정이 동하는 사람.
이 책의 모든 단편집들은 '섬세하면서도 예민한' 결을 같이한다. 인물들의 작은 감정의 변화, 눈빛, 표정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전달한다. 그것들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 작은 날갯짓으로 관계가 변하고 사건이 발생한다.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몸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 고 생각했다. , <그 여름> 중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으로 처음 읽었다. 작품성이 높다는 호평이 많았지만 제목이나 표지의 분위기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우울해지는 게 싫어서 읽기를 미루었다. 우울한 건 맞다. 딱히 해피엔딩이라거나 장엄한 결말도 없다.
그치만 이런게 문학이 주는 '위로'의 기능일까.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인간의 가느다란 기질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타인의 상처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된다.
진희와 함께한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 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