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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22. 2024

아, 파트 아, 파트

파트타이머의 진심

"선생님 날짜가 금요일 말고 토요일은 안 되실까요? 제가 평일에는 올 수가 없어요." 
"퇴근하고 와야 되어서 더 늦게는 안 될까요?"

진료 중에 이런 부탁을 받을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실 어떻게든 스케줄을 조정해서 환자를 맞아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나는 풀타임 치과의사가 아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겨우 며칠 정해진 요일에 진료하는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다. 일주일 내내 약속된 시간 안에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환자들의 요구를 맞추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금요일에는 안 될까요? 격주 토요일은 이미 꽉 차서요..."라고 조심스럽게 답하면 환자들은 아쉬운 눈빛을 보낸다. 내가 시간을 더 쪼개서 일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환자들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말라붙은 건포도처럼 쪼그라들어 미안해지는 걸 어쩌나.


 치과에서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현관문을 열면 아이의 환한 얼굴이 나를 맞이한다. “엄마! 이제 우리 같이 놀자.” 이 말이 반갑기도 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힘에 부치는 순간도 있다. 아니다, 대체로 버겁다. 하루 종일 환자들과 씨름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또 다른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라는 가면으로 허겁지겁 갈아 끼우고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미소로 대답한다. “그래, 잠깐만. 엄마 옷 좀 갈아입고 오자.” 


그렇게 겨우 옷을 갈아입고 나면, 곧바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된다. 둘째 아이가 놀아달라고 졸라대는 와중에 냉장고를 열어 저녁 반찬거리를 꺼내고, “조금만 기다려, 밥부터 먹고 놀자”라고 아이를 달래 본다. “엄마, 나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첫째 아이가 외치는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가 연필을 쥐고 숙제를 도와주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오늘 치과에서 봤던 환자들이 떠오른다. ‘다음에 그 환자 신경치료 들어가야 하는데, 약속 시간 다시 확인해야겠다.’ 그렇게 마음 한편은 여전히 진료실에 남아 있다. 


아이와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문득문득 진료 중이던 환자들이 스쳐간다. ‘내일 환자분들 치료가 밀리지 않게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뒤섞인다. 한쪽으론 아이에게 숙제를 대충이라도 하라고 잔소리하면서, ‘이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라는 고민이 떠오른다.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한없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육아와 일 사이를 외줄 타기 하는 아슬아슬 긴장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이어가다 문득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침침해진 눈으로 희미하게 쳐다본다. ‘아, 누가 여기에 낯선 아줌마를 두고 갔나’ 싶다.



 요즘은 많이 단축되긴 했지만, 치아 치료를 위해서 최소 내원해야 하는 횟수가 있다. 근관치료(신경치료)의 경우 근관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에 꼼꼼하게 메워야 하는 과정을 순서대로 거쳐야 한다. 뿌리가 몇 개 인가에 따라, 근관의 개수가 몇 개 인가, 석회화 정도나 근관 모양의 난이도에 따라서 내원하는 횟수가 한 번에서 네다섯 번 이상까지 천차만별이니 간단히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오래 걸린다고 느껴지는 치료가 파트로 쪼개진 내 시간표에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선생님, 한 번에 끝낼 수 없나요?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환자들이 자주 묻는 질문에 이제는 

꼼꼼히 그리고 최대한 빨리 진행해 드릴게요.


라고 말씀드린다. 작은 미로 속을 탐색하는 탐험가처럼 정교하게 치아 안에 있는 신경관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을 가장 우선으로 하되, 짧은 진료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긴 호흡의 치료가 불편하지 않도록 애를 써본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마리의 토끼를 들고 환자와 함께 치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반, 저기에서도 반. 후라이드반 양념반 국룰이라며 나를 칭찬하고 싶다가도, 이것저것 섞인 잡탕밥이 되어버린 싸한 느낌에 짬짜면처럼 맛있는 하루는 자주 엎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든 양쪽의 기울기를 맞춰보려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또 다른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 노력이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치과와 가정 사이에서 나만의 곡선을 그리며 기우뚱기우뚱 균형을 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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