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사랑니 발치 이야기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치과 무용담의 대부분은 아마 사랑니 발치 이야기일 것이다. 건강하더라도 살면서 한 번쯤은 사랑니 검사를 받게 되는데,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썩거나 아픈 경우가 많아 수복 치료와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겪어 본 치과 치료가 아닐까. 깊게 위치한 사랑니를 뽑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턱이 빠질 것처럼 하마입을 하고 있다가 불쑥 들어온 치과의사의 얼굴과 손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속 시원히 말하려면 보통 하루 반나절은 꼬박 걸린다. 이 기나긴 이야기는 출산, 군대 경험담만큼이나 아직 치료를 시도하지 않은 새내기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결국 무시무시한 발치 기구들과 맞서 싸운 용기 있는 자들의 전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괴담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올곧게 난 사랑니를 갖고 있던 나에게 사랑니 통증이란 마치 VR 가상현실처럼 아주 가깝지만 멀게 느껴졌다.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도 예고도 없이 우리한 치통이 찾아왔다. 화들짝 놀라 손가락으로 치아를 탁탁 쳐보며 자가 검진을 시행해 보니, 이놈의 사랑니가 원인인 것 같았다. 동료 치과의사에게 순순히 나의 입을 벌리고 통증의 시발점이 어딘지 샅샅이 뒤져보게 한 결과, 조금씩 썩어나간 사랑니와 양치질이 잘 안 되는 안쪽의 부은 잇몸이 원인이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순간 머뭇거리는 꼴이 바로 사랑니와 이별하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했다. ‘조금만 더’를 반복하며 기다리기를 하루 이틀, 이주 삼주. 이제는 더 이상 차일피일 미루며 불편한 사랑니와의 동거를 좌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발치해야 됩니다." 갖고 있어도 음식을 씹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상태가 많이 나빠진 치아의 경우 뽑는 게 치료이기에, 햇병아리 시절에는 일부러 더 단호하고 건조하게 말하기도 했다. 다 썩어 뿌리만 남은 치아라도 남아 있는 게 좋지 않냐 아픈 턱을 부여잡고 간절히 이야기하는 환자분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어서 뽑는 게 도움이 되실 거라며 아픈 소리를 한 번 더 해 본의 아니게 마음의 비수를 꽂는 경우도 많았다.
Everyone has a plan. Until get punched in the mouth.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한 대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의 명언대로, 직접 사랑니가 뽑힐 상황이 되니 그제야 VR 기계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머뭇거리는 감각이 살갗에 느껴진다. 머리로는 누구보다 뽑는 게 치료라는 걸 알면서 마음은 아직 치아와 헤어질 수 없는, 그야말로 이성과 감정이 분리되는 간이 임사 체험이랄까. 쿨하게 사랑니 발치에 동참하려는 계획은 여지없이 강펀치와 함께 날아가 버리고 나니, 역지사지 환자분의 마음이 오롯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흑과 백,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그럴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럴 수 있죠. 저도 미루고 그랬어요." 조금은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긴 것이 그대로 환자분께 전달되기를. 두렵던 마음이 잦아들 때쯤 발치 이야기를 건네 본다. 우리 사이에 예열된 시간으로 온전히 이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