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날씨
'여행 갈 때 비가 올까 봐 걱정돼.'
라고 자칭 여행 전문 글쟁이인 나에게 고민을 토로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걱정 넣어두시라.
그 부분만큼은 여행이 가진 힘에 의지하시길.'
잘 생각해봐야 한다.
그 쉼의 목적이 '휴양'인지, '여행'인지 말이다.
일단 휴양은 '편안히 쉬면서 몸과 마음을 보양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안히, 또 보양하기 위한 환경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폭우가 오거나 돌풍이 부는 곳에서 편하기란 제법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니, 휴양이 목적인데 날씨가 안 좋다... 한다면, 유감이다. 필자는 휴양에 관해서는 영 젬병이다.
여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부터 찾아야 한다. 필자는 기억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 간다. 아마 대부분이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억과 추억을 만들러 떠나는 것일까?
삶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루어져 있다. 기억과 추억은 과거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미래를 구상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자료로써 활용된다. 기억과 추억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많아지면 인생이 치밀해진다.
다음으로 비교적 쉬운 이유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흥미가 많은 삶은 재밌다는 것이다.
여행의 이유가 이러하니 여행의 목적은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많이 가져오는 것이 된다.
허나, 쉽지 않다. 기억에 남으려면 일단 익숙하지 않아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어렵고, 피곤하다.
하지만 우리는 망각의 동물. 또는, 미화의 동물이다. 익숙하지 않은 무엇을 경험했을 때 실제했던 통증은 잊어버리고, 고통을 이겨낸 순간들을 박제한다.
여기서 그 '날씨'라는 역경으로 박제된 몇 가지 '기억'을 소개하려 한다.
꿈과 낭만이 충만한 13살 주구의 이야기다.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아람단 하계 훈련을 떠난다. 장소는 에버랜드, 훈련 장소가 놀이공원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 세계의 청소년으로서 우리나라의 꿈과 희망을 보호하러 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렇게 넓은 곳을 방위하려면 높은 곳에서 감시해야 하기에 티익스프레스를 타고, 관람차를 타고, 더블락스핀을 탔다. 혹시 모를 해양에서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성실히 아마존익스프레스와 바이킹을 탔다. 또, 밀림에서의 공격전을 대비하기 위해 열심히 동물원을 가고 사파리월드를 방문했다. 나는 꽤 비장한 아람단원이었던 것이다.
열심히 훈련에 임하던 차에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팔을 입었던 기억으로 추측하자면 시기는 장마 초입정도로 예상된다. 그곳의 모든 놀이기구... 가 아닌 훈련기구는 작동을 멈췄고 사람들은 모두 실내로 들어가 무인 놀이공원이 되었다. 나와 내 친구인 '세라'도 금세 홀딱 젖어버렸고 우왕좌왕하는 그때, 눈이 마주치던 순간이 기억이 난다.
'그냥 비 맞아볼까?' 하는 무언의 제의 겸 동의를 주고받았고 13살의 우리는 폭우 속을 마구 헤집었다.
소나기였던 모양이다.
길지 않은 시간 뒤에 해가 뜨고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멀끔한 사람들 사이에서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다닐 때의 머쓱함, 속옷까지 홀딱 젖은 몸으로 오랜 시간 관광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의 불쾌함 같은 역경은 그 추억의 맨 뒷장에 수록된 부록 정도로 남아있고, 그 친구와의 눈빛교환과 빗 속에서의 순간은 하이라이트로써 추억의 정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내면의 한 곳에는 뼈에 새겨진 추위가 있다.
뉴욕에서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이다. 뉴욕의 크리스마스 당일은 황량하다. 이브까지는 온 골목이 축제 분위기지만, 당일에는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들과 보낸다고 한다- 까지는 알고 갔지만 정말 아무도 없었다. 배는 고프고 길거리는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은 내복 속을 파고들어 뼈에 스치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짧은 겨울의 햇빛이 소중해서 치아를 탁탁 부딪히면서도 기어코 그 추위 속을 걸어 다녔다. 아람단원으로서 유년기를 보낸 덕일까- 방범대의 기질을 발휘하여 그곳의 골목골목을 어슬렁 댔다. 어느덧 뉴욕대학교를 방위할 때 즈음 한계가 느껴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의 따듯한 색감이 보이자 '따듯한 국물이 필요하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먹고 싶다'가 아닌 '필요하다'였다. 이제는 잘 펴지지 않는 손을 써가며 국물요리 집을 찾아냈다. 뉴욕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남짓 걸리는 정도였는데 그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나는 정말 한계였던 것이다. 이러다 관절이 얼어버려 더 이상 걷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들 때 즈음 가게에 도착했다.
따듯하고 평화로운 그 일본 음식 전문점에 한기를 잔뜩 머금고 들어가서 달달 떨리는 턱으로 우동 하나를 주문했다, 얼어붙은 검지손가락 관절로 '1' 비슷한 실루엣을 만들며. 세숫대야 크기의 흰 그릇에 야채가 가득 담긴 우동이 나왔다. 한눈에 보아도 따듯한 모양새였다. 아지랑이 같이 올라오는 김 위로 손을 대고 녹였다. 그리곤 그 국물을 한 모금 하 는 데 - - -
참 맛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걸 보면 꽤나 충격적인 맛이었나 보다. 채소를 좋아하지만 따듯하게 올라오는 비릿한 생채소의 냄새는 영 입맛을 돋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따듯했다. 그럼 됐다- 하는 생각을 하며, 양이 많고 맛없지만 따듯한 온기를 먹었다. 굳이 그 맛없는 우동이 기억에 남는 건 혹독한 추위 덕분일 것이다. 통증은 더 이상 실제하지 않지만 그 역경은 황량한 크리스마스 뉴욕을, 맛없는 우동집을, 성근 발걸음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언제까지고 남겨질 나의 일부가 되게 하였다.
여행이 가진 힘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
그저 여행의 힘 뒤에 숨어,
순간을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