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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Dec 14. 2023

줄 수 있는 애틋함이 고작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은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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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의미의 축제> 중




춘천의 꼬치구이 전문점, 저녁, 초겨울, 추위. 기억나니? 그때를 생각하면 내 몸 어딘가가 막히는 느낌이 들어. 뜨끈한 내장이 비틀어지다가 이윽고는 빵-하고 터지는 상상과 함께.


겨울의 초입에는 여러 해를 거쳐도 익숙해지지 않는 추위가 찾아오고 매번 살짝 느린 나는 매년 무방비해. 나의 고향보다 한발 일찍 추위가 찾아오는 너의 그곳에 갈 때, 기차역에 도착하고선 찬 숨에 기가 죽어 있으면 플랫폼 근처에 서서 애인을 찾는 네가 보여. 아무리 멀리서도 너는 나를 찾아내곤 배실배실 웃으며 걸어오더니 손을 잡으면 그 안에 따듯하게 데운 손난로가 있는 거야. 느린 애인을 위해 만나기 한참 전부터 손난로를 데우는 시간을, 네가 몇 해나 반복했는지 헤아리다가 나의 미숙함을 반성하고 너의 애틋함에 감사해.


이번 해에도 역시 나는 느렸고 또 한 번 애틋했어. 근데 나는 어둠을 떠올렸어, 내 안에 있는 구멍을 떠올렸어.

어스름이 진 저녁, 추위로부터 도망치듯이 춘천역 근처에 있는 작은 꼬치집으로 뛰어 들어갔던 날 기억나지. 주문한 꼬치가 한 겹 한 겹 구워지는 동안 우리는 얘기를 했어. 나는 계속해서 영양가 없는, 긴 장난 같은 얘기를 쏟아냈고 너는 반응하고 또 누군가 얘기하고 웃고. 진지한 얘기를 하면 큰 창피를 당할 것 같은 사람처럼 가벼운 것들이 내 입에서 쏟아졌고 그것이 몹시 괴로웠어. 조금이라도 무게가 있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어. 그렇다고 너를 만나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워서 내 안의 중요한 것을 외면하면서 또다시 그 기차역에서 서서 너의 시선을 기다린 거야.

애인과 어둠과 구멍과 외면 사이에서 나는 그 손난로를 잡고 있었어. 긴 하루동안 애쓴 그것은 거의 식어버렸는데 숨어있는 온기를 찾아내려는 듯 마구 주물렀어.


추위에 차츰 익숙해진 겨울의 중반에서 길가에 파는 손난로를 보며 나는 그날을 떠올린 것이고, 쉽지 않겠지만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어. 자기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내가 되길. 네가 나에게 그런 것처럼 너에게도 안정을 줄 수 있는 내가 되길.


작은 가판대 앞에서 너를 떠올리며,

줄 수 있는 애틋함이 고작 이런 것뿐이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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