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풍경의 한 조각이라서 오히려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을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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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
그런 곳에 나는 갔다.
작은 어촌 마을인 그곳에는 성근 바람과 눈발이 날렸다. 얼마나 성글었냐 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숙소의 진동과 신호가 끊어진 티브이의 송출오류음의 합주로 하여금 밤새 어마무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정도랄까. 상상 속에서 나는 곡소리 나는 장례식장의 상주가 되기도 했고 그 식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약간의 각색을 더해 몇 번이고 변모하며 반복하다가 선잠에 빠졌고 문득 상상이 걷히고 긴장을 풀었을 때 비로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이른 아침부터 성근 눈이 뿌려지고 있었다.
이 하늘이 산산조각 나서 떨어지는 듯한 촘촘하고 성근 눈발이었다.
짐을 챙겨 멀리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회색이었다. 또한 그 흔한 파도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었다. 목적지에 가는 내내 나는 자주 회색과 정적을 쳐다보았다. 탁한 서해의 빛깔과 겨울은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묘한 기운이 감도는 바다를 자세히 바라보니 눈이 쌓인 채로 회색을 표류하는 작은 나룻배와 몇 개와 부표가 보였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희미한 곳에서의 생명 하나와 나룻배 하나와 그 사이의 칠흑. 이 풍경 사이에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자 당장 이 칠흑에 빠져 풍경의 유일한 옥에 티를 없애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이곳의 회색과 정적과 죽음과 추위에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를 지우고 완전한 풍경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일부가 되고 싶은 욕망.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면 행복하고 또한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