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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Jan 22. 2024

바다는 없고 파도는 있었다

짧고 불쾌한 잠이었다. 자는 동안 마치 누가 내 몸 위에 계속 걸터앉아 있었던 것 같은 감촉이 몸에 남아 있었다.

.

.

.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파도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나에게로 와 이윽고 한 평짜리 공간을 집어삼킬듯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부수고, 흔적도 없이 되돌려 가는 것이다. 단숨에, 그럴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 공간이 하나의 배로써 파도 속을 표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머나먼 대양의 한가운데를 본 적 있다. 그 대단한 너울들과 힘과 전복될 듯 말 듯 흘러가는 한 척을 떠올렸다. 선장의 모습도 떠올렸다. 베테랑만이 그런 거친 배의 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두고선 마치 일상의 한 부분을 대하는 듯한 익숙한 태도, 그을린 살갗, 파도를 닮은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고, 마지막으로 눈빛을 만들 때에는 약간의 시간을 더 들였다. 그런 너울을 압도하고서 이윽고 이겨내는, 샛노랗게 바랜 표면과 핏발 선 눈알 두 개를 찍어 넣고 나서, 나는 눈을 떴다.

불면을 인정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는 동안, 의식의 불빛이 저 멀리서부터 하나씩 탁-탁-탁- 소리를 내며 켜졌다.


바람이구나.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에 놀랐다. 정말로 파도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바다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면 그럴 수 있으려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바다는 여기서 너무 멀어, 아니 근데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파도소리잖아. 의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정말로 파도 소리는 실재했다. 인적이 드문 마을에 독채 주택만 덩그러니 있어 사위가 어두웠지만 방에서 새어 나온 작은 빛으로 주변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바람에 나무가 나부끼고 있었다.


나무들이구나.

이건 정말 파도소리인데, 하며 나는 오랫동안 의심의 눈초리로 나무를 보았다. 문으로 밀려들어오는 센 바람에 ‘현실적으로 확실하지만 어딘가 미적지근한 구석이 있는’ 판단을 내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이렇게나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내는 나무는 처음이었다. 분명 그간 숲에서 들었던 나부끼는 나무 소리는 잔잔한 해안가에서 들리는 그것처럼 평화로웠다.  


쉽게 떨쳐지지 않은 ‘어딘가 미적지근한 구석’은 악몽의 재료가 되어 자는 동안 몇 편의 꿈을 만들어 냈다. 질긴 이야기들이었다. 차라리 불면을 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악질이었고, 그 부탁을 아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나는 아주 혼자였다.


악몽이 끝나고 나서 공들여 만들어 냈던 선장의 눈빛을 떠올리고선 곧바로 나의 것을 떠올렸다.

비할 수 없이 약한 나의 것은 과연 나보다 큰 너울들을 압도할 수 있으려나.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나무뿐.


나는 잠에 들었다.

나는 파도에 들었다.

나는 나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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