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할 때의 불안에 대하여

타인과의 여행

by 정주구


여행은 점이 아닌 선이기에,
어떤 틈새로든 결국 부족함이 새어 나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불안이라는 그림 위에 옅은 색감의 안도감이라는 색료가 덧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색료는 약한 풍파에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약한 색처럼 보이기도,
어쩌면 얼마든지 덧칠할 수 있는 편한 색감 같기도 하였다.


숲_드로잉


눈을 감고 있어도 잠에 들기는 어려웠다. 양 옆의 고모와 고모부는 우려와 달리 편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그들에게는 첫 장시간 비행이기에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그런 걱정은 작곡가의 잘 못 쓰인 악보처럼 무참히 구겨져 휴지통으로 던져졌다. 오히려 잠에 들지 못하는 건 내 쪽이었다. 여행 당일에 고작 20분 정도 잤으니 이틀 동안 꼬박 깨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행 준비 기간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불안을 잘 외면하고 있었는데, 출발이 턱 끝까지 찾아오니 그 불안이 나의 뺨을 붙잡고 억지로 눈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그 시선을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것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불안은, 부족함을 충분히 잘 보여줄 수 있는 환경에 장시간 노출될 예정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남의 시선에 면역력이 굉장히 약해서 작은 시선에도 크게 영향을 받곤 했다. 해서, 타인(남이라고 쓰려다 나와 여행을 같이 했던 수많은 '남'들이 섭섭해할 것을 우려하여 순화된 표현으로 수정하였다)과 같이 하는 여행의 그 준비 과정에서 온전한 설렘을 느꼈던 적이 거의 없다. 오바를 곁들이긴 했지만, 사실이다. 즉흥적으로 여행을 확약하고 확약일이 다가올수록 피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지며 어떠한 일로든 여행이 취소되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했다. 어떤 여행에서는 진심으로 행복했지만 대부분의 여행에서는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집이라는 목적지까지 완주하는 순간을 조용히 '견뎌'내기도 했다.

그동안 단 몇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에서는 나의 부족함을 최대한 숨길 수 있었지만, 여행은 점이 아닌 선이기에 어떤 틈새로든 결국 부족함이 새어 나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부족함은 곧 나의 본성, 진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로 남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을 경계한다. 누군가는 너무 예민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런 것들을 혐오한다.


그런 생각들이 감은 눈에 둥둥 표류하며 어떠한 일렁임을 만들어가고 있을 때쯤, 어떤 지점에서 표류하던 것들은 한데 뭉쳐져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후 나는 좌측의 고모와 우측의 고모부의 어깨를 빌려가며 잠을 잤다. 비행시간을 보니 약 한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지만, 머리를 좌, 우 그리고 아래 방향으로 헤드뱅잉 하는 것을 본 고모와 고모부는 장난기 서린 눈으로 머쓱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스킨십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쓱한 생각과 약간의 억울함으로 잠은 완전히 깨버렸고 우리는 승무원을 호출했다. 곧, 맥주와 안줏거리를 가져다주었고 열심히 자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 셋은 머리 위에 있는 조명을 켜놓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수학여행 온 것 같다고 하며 갑자기 상기된 얼굴을 하는 양 옆의 그들을 보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의 장시간 비행을 경험한 나에게 이제는 기내에서의 시간이 딱히 특별하다고 할 순 없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질 때, 나는 스무 살 여름에 있었던 첫 장시간 비행의 순간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스무 살 엘에이행 비행은 그들의 상기된 표정과 맞물렸다. 불안이라는 그림 위에 옅은 색감의 안도감이라는 색료가 덧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색료는 약한 풍파에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약한 색처럼 보이기도, 어쩌면 얼마든지 덧칠할 수 있는 편한 색감 같기도 하였다.




KakaoTalk_20230409_184345051.jpg 기내에서 맥주 한 잔이 주는 안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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