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기억
당첨이다.
인상적인 첫사랑을 한 당신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당첨 선물로 드리겠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한들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기억의 바다 일부로써 언제까지나 존재할 테니 말이다.
대게,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이 세월의 풍파에 더 쉽게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네 과거가 넘실대는 기억의 바다에는 과거의 상공에서 언제까지나 부는 '미화'라는 바람이 있는데, 부정적인 기억은 이 미화라는 바람에 더 쉽게 부식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기억의 바다에는 각자 살아가며 생긴 조류에 따라 몇 가지의 대양이 있을 것이고 그 조류를 따라 여러 추억을 실어 나르는 선박이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기억의 바다는 우주만큼이나 광활하고 깊기 때문에 폭풍우나 배 자체의 결손문제 등의 갖가지 이유로 꽤 많은 배들이 난파되곤 한다. 곰곰이 과거의 바닷속을 탐색해서 침몰선의 흔적을 찾아내거나, 예기치 않게 휩쓸려 온 난파선의 잔해 즉 기억의 편린들을 마주할 때면, 이미 생명력을 잃고 해변가에 흩뿌려져 있는 조개껍데기 정도의 무게만큼이나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무 살 6월, 대학에서 강의를 듣다가 문득 '나 미국 가야겠다'하는 생각이 스쳤다. 스무 살의 치기가 만든 바람에 엘에이행 나룻배가 무작정 나의 항구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허름한 나룻배 안에는 미국산 호기심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 강의가 끝나고 나와서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무작정 '저 미국에 가야 해요' 했다. 아버지는 그런 류의 전쟁을 여러 번 겪어본 사람처럼 침착하고 능숙하게 대처하셨다. 시간이 흘러 '엘에이행 대양'을 항해하는 배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지금, 나에게는 당연스레 밀려온 나룻배였지만 그에게는 느닷없이 쳐들어온 군함처럼 느껴졌을 것을 생각하니, 이제야 그런 대책 없는 태도가 아쉽다. 스무 살의 막내딸을 혼자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버지로서는 결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침착함의 기반에 당연함은 없었을 수도 있다. 그저 나에게 불어온 당연함 뒤에, 그에게로는 존중이라는 바람이 불어왔으리라 생각해 본다.
나에 대한 그의 존중이 만들어낸 어떤 '당연한' 기류 아래 호기심의 조류가 형성되어 나룻배가 내 안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엘에이 여행으로 내 기억의 바다에는 큰 '엘에이행 대양'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나의 바다에서 중심을 지키는 대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출발과 함께 추억을 적재해 올 거대한 화물선들이 출항을 준비했다. 태초의 작은 나룻배 또한 초라한 기색 없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엘에이까지 10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비행을 거쳐야 했지만, 그 대부분의 시간을 설레는 마음과 함께 뜬 눈으로 보냈다. 누군가, 그렇게 설레는 10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면, 정확히 뭘 했는지 그런 세세한 일까지는 읊을 순 없지만 그렇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일로 10시간을 보냈고, 그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로도 10시간을 곧 잘 버틸 만큼 설레었다고 답할 것이다. 그저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흥미로웠다. 기내식도 신기하고, 화장실도 신기하고, 심지어는 옆에 앉은 사람도 신기하다. 또, 기내에서 보는 일출인지 일몰인지 모를 것과 스쳐 지나간 많은 별들이 신기했다. 처음이란 그런 것이다.
비행기의 가장 끝에 앉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그런 자리를 앉으라고 한다면 절박한 심정으로 비행 전까지 누군가 취소했을 앞자리를 호시탐탐 노렸겠지만, 나는 그때 이 여행에서 그저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에 겨워있었기 때문에 그 만족감 뒤에 있는 불편은 알아차릴 새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도 그런 류의 설렘 때문에 잠을 못 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여행 후 돌아왔을 때 몸무게가 무려 5킬로나 빠져있어서 놀랐던 후일담도 있다. 막상 몸은 불편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앞에 다채롭게 짜인 매력적인 감정들에 마취되어 고통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위 내용 중 '여행'을 '사랑'으로 대입하여 다시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다시 읽는 동안, 맞다며 맞장구치며 내려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첨이다. 인상적인 첫사랑을 한 당신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당첨 선물로 드리겠다. 여기서는 '인상적인'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멋진' 내지는 '성공적인'이 아니라 '인상적인 처음'이란, 좋은 기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상관없이 폭풍우를 겪고 기억의 바다에서 살아남아, 여전히 항해하는 기억을 의미한다.
여행 또한 그렇다. 그때 당시에 좋았던 여행이든 힘들었던 여행이든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남는 여행이 성공한 여행이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힘들었던 여행보다 아무런 특징이 없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여행이 그야말로 죽은 여행, 실패한 여행이라는 말이다.
조용히 가라앉아 해저 깊숙한 곳에 조용히 묻혀 의미를 잃은 난파된 배. 우리의 바다에는 그런 침몰선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운 좋게도 그 잔해가 어떤 계기로 휩쓸려 올 수도 있지만, 한 번쯤 그런 난파선들을 탐색해 나서 보는 것을 어떨까. 쉽게 포기했던 그곳을 찾아보니, 이름을 잃은 '無'를 실은 난파선이 아니라 의미를 가득 실은 보물선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한들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를 살게 하는 기억의 바다 일부로써 언제까지나 존재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