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죽음
거지 같다.
애쓰는 우리는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사람을 사랑할지, 어떤 것을 포기할지 그리고 무언가를 죽일지, 살려줄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지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고민할 시간 또한 충분하다. 하지만, 어떤 선택에서는 영영 판단을 보류하기도 하고 그 보류를 끝내버리기도 한다. 다소 어지러운 사고에 대한 얘기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일제히 '명확'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마침내 그 순간에는 분명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에 매번 우산을 가지고 나갈지 말지를 항상 우왕좌왕 고민하다가도, 기묘할 정도로 차분한 어느 날에는 고민 없이 '응당', '당연히', '매번 그래왔던 사람인 듯이' 우산을 놓고 나가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결정은, 사고처럼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어지러운 무작위성에, 판단의 가벼움에, 현기증이 느껴진다.
그 순간은 무작위적로 찾아온다. 사고와도 같은 결정이 끝나면,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는 여운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단 한 번뿐인 선택이 있다. 음식 메뉴처럼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것과 사뭇 다른 선택 말이다. 그 일회성은 특별함을 부여한다. 단발적인 특별함은 찬란하다. 낙화하는 노을의 윤슬을 보고 찬란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허무와 찬란은 마치 밤의 바닷가에서 저 멀리 보이는 오징어잡이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밤에 보는 오징어잡이 배는, 낮의 초라한 그것과 다르게 '명확'하다. 그것 여럿이 모여 은하수가 되고, 계속 있다가 계속 있다가 수평선을 넘어가면 '분명히' 없어지게 된다. 우리는 그저 밤의 바닷가에 앉아 그 오징어잡이 배로부터 잉태되는 빛의 탄생과, 그것의 유동성과 허망한 죽음을 응시한다. 그리곤 허망함과 찬란함 사이에서 어지러워하다가 그저 아름답다고 말할 뿐인 것이다.
무수히 펼쳐져 있는 존재, 허무, 찬란으로 하여금 수평선이 무겁게 가라앉을 것 같이 아찔할 때, 헤아릴 수 없는 그것들은 한데 뒤섞여, 오징어잡이 배 하나를 저 아찔한 선 아래로 침몰시킨다. 천천히 질식되다가, 원래는 없던 것처럼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없어진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사고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그 허무함과 찬란함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더 이상 아름답다는 보류는 없는 채로.
우리는 오징어잡이 배다. 작은 어선에 전구 몇 개 달린 것이 꽤나 형편없는 모양새이지만, 저 멀리 수평선에 걸쳐지면 우주의 별이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우리는 사라지고, 또 무수히 많은 우리가 생겨나겠지.
우리는 찬란해서 허무하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같다.
우리는 허무해서 찬란하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같다.
이 어지러운 무작위성에,
판단의 가벼움에,
현기증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