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꺼림칙한 거스름이 부유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이내, 무릎에 얹어 놓고 눈을 감는다.
문단과 문장과 글자 사이의 관계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가령,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에서 '어둠'과 '사물'과 '희다'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문장도, 다음 문단도 나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을 헤집어놓는 이 고철 덩어리의 속도감뿐이다.
그렇게, 나를 태운 야간열차는 나아간다.
눈을 뜨고 차창으로 고개를 젖혔다.
기묘하게 그늘진 내가 비치고
나의 그늘 너머로 어쩌다 빛 하나씩, 다문다문 보일 뿐이었다.
이제는 책을 완전히 가방에 넣어버렸다.
여러 개의 가로등과 여러 개의 갈림길이 지나갔다.
가로등 하나에 길 하나
가로등 하나에 길 두 개
가로등 하나에 길 세 개까지.
어리석은 아무개가 물었다.
왜 똑같은 가로등인데, 비추고 있는 길의 개수가 다른가요?
가로등 사이를 메우는 그늘은 답했다.
숙명입니다. 피할 수 없는 가로등의 운명이죠.
어리석은 또 다른 아무개가 물었다.
그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길 하나에 가로등 하나
길 두 개에 가로등 두 개
길 세 개에 가로등 세 개로 하죠.
공평하게요.
그늘은 답했다.
공평한 것은 무엇인가요?
공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희 같은 그늘에게 공평을 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길의 개수를 세는 방법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개는 질문하지 않는다.
가로등도 길도 사라졌다.
차창에는, 그늘진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