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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Jun 01. 2023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야산과 불한당



미적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작은 구멍을 타고 들어온 그것들은

기관지와 폐 그리고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끈적하게 들러붙는다.



블라인드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빛들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기어코 나의 한 평짜리 공간에 들어와 앉아있다. 제아무리 꼼꼼히 막아도 그것들은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세밀히 빈틈을 찾아내 이곳에 들어와 앉는다. 그들의 난행이 지나치면 나는 무방비하게 눈을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빛이란 이름을 한 불한당. 암만 이곳저곳으로 읍소해도, 이 불한당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이는 없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미묘한 빛으로도 나는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여전히, 꾸준히, 변함없이, 한결같이, 여느 때와 같이 늦잠을 잤다는 것도 나는 가늠해 낼 수 있다. 아주 쉽게 말이다.


이런 짧은 의심의 흐름 속에서 미적지근한 그것들 또한 여전히 내 안 곳곳을 점거해가고 있었다. 불한당들로부터 지켜내려고 한 노력한 만큼이나 쿰쿰하고 축축하고 낮게 가라앉은 공기들은, 나의 자각과 동시에 더욱더 격렬히 쿰쿰하고 축축하고 낮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다면 그것들은 쿰쿰하고 축축하고 낮게 가라앉는 것에 멈추지 않고 어떠한 모습을 한 채 눈에 보일 것만 같다. 끈적하고 괴상한 것들 말이다. 그러다 결국은 구석구석부터 모세혈관을 타고 폐와 기관지를 서서히 잠식하며 이윽고 나를 막아낼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마치 산채로 밤의 야산에 묻힌 것만 같이 괴로워진다. 대체로 사람들은 야산을 떠올리면 일반적인 숲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친절한 데크, 표지판, 인간의 흔적이 서린 길만을 상상으로 겨우 지울 뿐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야산은 상상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실제 야산을 본 적이 있다. 봤다기보다는 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은 나는 갔다기보다 그저 바라봤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야산을 바라봤다. 대낮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말 완전히 없었다. 나의 단칸방에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아주 까만색이었다. 그런 암막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산이라는 장소가 뿜어내는 씨앗들은 제각기 살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듯 보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날 때부터 영양이 결여되어서 그런지, 숲의 나무라고 부르기 머쓱할 정도로 모두들 앙상했다. 끽해야 성인 남성의 팔 굵기 정도 될 것 같은 그것들은 어떻게든 새어 나오는 햇빛을 받기 위해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려, 한층 더 기이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눈치 없이 싹을 틔어버린 아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꽤 오래 아기 나무로 지내왔을 또 지낼 그것들은, 야산에 절망을 낮게 깔아내고 있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생명이 그득그득한 그 암흑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정말로 야산을 보았다.


낮이나 밤이나 야산은 끊임없이 암흑일 테지만, 밤의 야산은 한없이 고립된 모습일 것이다. 이미 암흑이지만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완벽한 암흑이겠지.




그런 야산에 묻힌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작은 구멍으로 투박한 흙이 넘어 들어와 기관지와 폐를 서서히 잠식하고는 조금 더 조금더구석구석잠식하려할때쯤멈추게될것이다.그리고는기근을겪는그득그득한생명들이달려들것이다.마침내나는그들의일부가되어그곳에영겁으로갇히게된다.그득그득한생명의일부로서한때나를죽게했던불한당을갈구하며이리저리관절을뒤트는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나의 구석구석에, 그 한 틈에 자리 잡은 야산에 빛 한쪽을 내려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야산과 불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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