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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Sep 02. 2024

느린 시간을 위해 비운다

그날의 일정을 기억하기 위해 캘린더에 기록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면 캘린더부터 확인한다. 해야 할 일이 쌓여있으면 마음은 자연스레 조급해진다. 

이런 날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새도 없이 마음은 벌써 다음 해야 할 일을 기웃거린다. 일을 끝내도 되돌아보거나 곱씹을 여유는 없다. 하루 일정을 다 마치고 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너덜너덜 거리는 마음만 남게 된다.

하여 캘린더 속 빽빽한 스케줄을 보면 숨이 턱 막히다가 너른 공백이 가득한 날에는 마음에 평온이 깃든다. 

여백이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만큼 나에게 여유 있는 시간은 중요한 삶의 가치이다. 

너른 공간을 위해 물건을 비우듯 느린 시간을 위해 물건을 비우고 있다. 

물건을 비우면 공간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비워낸 만큼 활용할 수 있는 시간 또한 늘어난다. 물건 하나에는 관리하고 가꿔주는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건을 많이 소유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편의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이 발행한다. 편리함 때문에 들인 많은 물건들이 우리의 귀한 시간을 잡아먹게 되는 것이다. 

정작 물건은 꼭 필요한 하나, 아니면 아예 없어도 되는 경우가 많다. 

물건이 줄어들어 늘어나는 불편함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회복하는 공간과 시간으로 삶의 질은 올라간다.     



말끔하게 집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부지런하다는 이미지를 갖기 쉽다. 실제로 집 사진을 블로그에 올릴 때면 부지런하다는 피드백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에만 부지런한 사람이다. 

정리와 청소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즐길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부지런해서 집이 깔끔한 것은 아니다. 

물건 수가 줄어드니 정리할 물건 수도 줄어든다. 매일 사용하는 소량의 물건만 사용 후 바로 제자리에 돌려두면 따로 정리할 게 없다. 물건을 비워냄으로써 여백이 곳곳에 마주한다. 여백은 그 자체만으로 깔끔하고 쾌적한 인상을 제공한다. 시간을 내어 대청소를 해야 빛이 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항시 깔끔한 공간에 함께이다. 청소와 정리 시간이 줄어든 만큼 하루의 시간은 느려진다. 집 치우는 영역에서는 한없이 게으르고 싶다. 느린 시간을 게으르게 향유하기 위해서 물건을 비우고 있다.

실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나는 부지런한 토끼보다 느린 나무늘보에 가깝다. 깡충깡충 뛰면서 바쁘게 사는 토끼의 삶보다 느려도 느긋하고 유유자적한 나무늘보의 삶이 좋다. 

이룬 성취가 많지만 정신없는 토끼의 삶보다 조금 덜 이루더라도 천천히 흘러가는 나무늘보의 삶이 좋다.

게으를 수 만 있다면 나무늘보처럼 게으르고 싶다. 알람 없는 아침을 좋아한다. 아무 의무도 없이 눈뜨고 싶을 때 눈뜨는 가벼움, 시간 맞춰하는 식사보다 배가 고플 때 챙겨 먹는 유연함, 공백으로 가득한 시간 앞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를 애정한다.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약속이 취소된 아쉬움 대신 찾아온 빈 시간의 반가움이 더 크다.     




시간은 모래와 같아서 의식하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한다. 

시간의 조각을 손 위에 올린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피부로 느낀다.      


나무늘보는 게을러 보여도 누구보다 시간을 충실히 음미하고 있다. 그에게 지금을 누릴 충분한 시간과 보낸 시간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있다. 

그렇게 뒤로 보낸 시간은 하루를 보다 촘촘하게 직조한다. 삶을 보다 단단하게 다져준다.

느린 나무늘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물건을 비우고 시간의 모래를 손에 움켜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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