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하 Sep 04. 2024

고품질 소비


다운 사이징을 시작하고 초기에 많은 물건들을 비웠다. 

처음에는 물건이 떠난 빈자리가 주는 홀가분함이 좋았다. 하지만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헛헛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소유에 대한 미련은 아니었다. 쉽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삶을 스쳐가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일 테지만 이런 작은 점들이 쌓여가면서 상실감도 자라갔다. 살아가면서 이런 무수히 많은 이별을 다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여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물건의 양보다 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저품질 물건을 여러 개 사는 것 보다 양질의 물건 한 개를 구입하는 것이다. 물론 가격이 높다고 무조건 품질이 높은 건 아니지만, 고품질의 물건은 대부분 가격이 높다. 가격이 낮은 제품은 대부분 그 값을 한다. ‘싼게 비지떡이야’ 라는 말을 마침표로 찍어 보낸 숱한 물건들이 있었다.

평소에 저품질의 물건 여러 개 쇼핑을 줄여 돈을 모은다. 모은 돈으로 한 개의 고품질 물건을 산다.      

신혼부터 사용하던 냄비세트가 코팅이 많이 해져 7년차에 비웠다. 비우기 몇 달전부터 냄비세트를 알아보았다. 가격이 싼 제품들은 별점이 낮은 후기에 꼭 안 좋은 후기들이 있었다. 다른 제품들을 부지런히 들여 보았지만 이미 정한 브랜드가 있었다. 그동안 주변에서 좋다고 익히 들었던 독일 브랜드였다. 인덕션과 공용으로 사용 가능하고 스텐 이어서 코팅 걱정도 필요 없는 제품이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냄비세트가 집에 온 날 설렘이 가득했다. 전에 쓰던 코팅 냄비보다 훨씬 가볍고 디자인도 심플했다. 무엇보다 유해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짐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다는 항구성에 흡족했다. 


8개월 후 가스레인지를 비우고 인덕션을 들였다. 이미 구입할 때 인덕션 겸용으로 샀기에 냄비를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 

인덕션으로 냄비의 효율을 측정할 수 있다는 말에 모든 냄비를 측정해보았다. 1~10까지 표시되고 수치가 높을수록 냄비 효율도 높다. 모든 냄비가 9가 나왔다. 

만약 그때 싸다고 인덕션 안되는 제품을 샀다면 인덕션을 들이면서 결국 두 번 돈을 써야 했을 것이다. 인덕션 겸용의 저렴한 제품을 샀다면 분명 효율도 더 낮았으리라. 

냄비 효율이 좋아서인지 전원을 켜자마자 1분도 안되서 물이 끓는 신세계를 접하고 있다. 현명한 고품질 소비가 오히려 돈을 버는 것임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의 품질이 올라간다는 건 그만큼 일상의 질 또한 상승함을 의미한다. 단지 명품백 같은 비싼 것을 샀다는 사치스러운 감정과는 거리가 있다. 내가 한 선택에 만족감이 스며드는 호사로움이다. 나에게 귀한 물건으로 대접하고 일상을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이 깃든다. 

꼭 부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으로 소비를 조절한다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사치이다.

오래 사용하는 만큼 물건과의 잦은 이별과도 멀어져 간다. 주변에 소중한 것들이 오래 머물게 되었다.     




이전 08화 느린 시간을 위해 비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