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사했다. 나는 이틀간 엄마의 이사를 도왔다. 16년간 거주한 집에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비울 것과 남길 것을 정해야 했다.
평생 절약 습관이 몸에 베어있는 엄마의 가전 가구는 16년 전 그 집에 이사 온 날짜로 멈춰있었다.
옷장에는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50년 된 이불,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모피코트부터 수년간 입지도 않은 옷들이 찬장에는 빛바랜 그릇들이 가득했다. 베란다에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최근에 수명이 다해 바꾼 TV와 침대, 이불 조금, 옷 조금, 식기류 조금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 비웠다.
자리 차지가 컸던 대형 가구 가전을 비워내고 1인 가구에 맞는 소형으로 바꿨다.
기다란 TV장식장 대신 벽걸이 TV로, 식탁은 사용하지 않아 없애고 거실에 평상만 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집이 이전 집보다 넓지?!"라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 30평에서 24평으로 이사 왔어" 그랬더니 엄마가 그래?! 하면서 놀랬다.
내가 봐도 이전 집보다 더 넓어 보였다.
결혼 전 본가에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재활용 비닐을 모아두었던 공간이 산처럼 부풀어 보였다. “엄마, 여기 비닐이 너무 많아. 몇 장만 남기고 버려도 될까?”라고 물어보면 비닐도 사려면 돈이야, 그냥 둬. 라는 여느 때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수입은 항상 들쑥날쑥했고, 그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엄마는 항상 절약하셨다. 엄마에게 절약이란 무조건 남겨두는 것이었다. 반대로 버리는 것은 낭비라고 여기셨다. 언젠가 생길 쓸모를 위해 항시 비움보다는 보관을 택하셨다. 그런 이유로 베란다와 옷장, 냉장고, 찬장에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고 비움이 전해주는 안온한 평온함이 좋아서 엄마에게 자주 이야기했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듣기만 하셨다. 마침내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는 계기로 비울 수 있었다.
만 하루도 안 되어 대량의 물건을 다 비우고 그 물건들의 진짜 가치를 목도 한 이 경험은 8년간 비움생활을 해온 나에게도 큰 각인이 되었다. 성인 4~5명이 족히 들어갈 것 같던 거대한 산과 같던 포대자루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한 달 후 집들이 때 찾아온 본가에는 더 이상 비닐 산도, 냉장고 속 블랙홀도 사라지고, 거실의 명당을 물건에 내어주지도 않는다. 물건들이 없으니 청소할 시간도 줄어들었고, 30평에서 24평으로 좁게 이사 왔음에도 넓다고 좋아하신다.
수많은 짐들을 비우고 나서야 삶을 둘러싸고 있던 물건들의 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본가에 짐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눈에 익은 풍경이라 그 크기가 보이지 않았다. 다 비우고 이사를 와서야 알게 되었다. 16년간 엄마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매여있었는지, 30평 집의 대부분 공간을 짐들에 내어주고 있었는지를.
물건을 버리는 행위를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계속 가지고 있으면 다음에 또 사지 않아도 되니 돈을 절약한다고 생각하기 쉽기에. 실제로는 평당 몇천만 원 하는 비싼 공간을 물건을 위한 자릿세를 내주고 있는 것이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인식하기란 어렵다. 그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데에 들이는 시간과 우리의 에너지까지 환산하면 오히려 더 큰 손실이 될 테다.
절약은 무작정 오래도록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아낀다고 오래도록 가지고만 있다면 그건 오히려 물건의 순환을 망치는 일이다. 오래도록 고여만 있는 물건은 물건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잘 사용될 때 비로소 물건도 활기를 띤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오래된 물건은 고물로 전락하고 만다. 아끼다 똥된다는 말이 생기는 배경이기도 하다.
절약은 물건이 아니다.
절약은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다.
물건을 잘 활용하고 소중히 사용하려는 알뜰한 마음에 있다.
이사하고 6개월이 지났을 때 엄마가 이야기 했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집이 참 좋아.
앞으로 남은 생을 이 집에서 보내야지.
이 말을 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집이 좋다는 말. 엄마에게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