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으로든 전체로든 자연을 바라보고 사색 하노라면 우리의 이성 앞에 광활한 기쁨의 지평이 펼쳐진다. 이어 그 기쁨의 대양 위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면서 기쁨의 양과 질은 배가 된다. 흩어진 감각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감각을 만든다..... 정신에서 빚어지는 인식, 마음에서 빚어지는 감각 그리고 오감에서 빚어지는 추억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기쁨과 행복을 길어 낼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속초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1년 2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니 바다가 여기저기 함께인 순간들이 많이 보인다.
탁 트인 하늘과 맞닿은 무한한 지평선에 담긴 바다
아가의 고른 숨소리 같다가, 어떤 때는 시베리안 호랑이처럼 성난 파도소리
눈물과 닮은 짠내가 나는 향
바다의 흔적을 직접 먹어보는 용감한 꼬맹이
결이 모두 다른 해변의 모래들
오감으로 다져가는 기억이 바다와 자라고 있는 3살 딸아이에게도, 엄마 아빠에게도 기쁨과 행복을 길어 낼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길 바라며 추억 조각들을 꺼내본다.
1. 밤바다 마실
바닷가로 여행을 떠날 때면 맑고 밝은 기운이 가득한 선명한 바다도 좋지만, 캄캄한 밤이 내린 어두운 바다가 더 매력적이다. 낮의 열기가 식은 모래를 등에 깔고 누워 눈을 감고 귀를 연다. 시끄러웠던 세계는 고요 속에 잠기고 바다와 나 사이에 파도만 존재한다. 종일 울려대던 마음의 잡음들을 나에게로 다가와 바다로 조금씩 가져가 버린다. 잠잠해진 평온함에 몸을 맡기고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다와 이어진 밤하늘에는 청초한 달님과 별빛들이 뿌려져 있다. 낮의 분주했던 세계를 까만 깊은 적막으로 덮어버리듯 영혼까지 감싸지는 기분이 든다.
1박 이상 바다로 여행을 갈 때 저녁을 먹고 밤바다를 꼭 챙기는 이유이다. 더운 여름밤에는 시원한 기운이 가득해서 좋고,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고독이 더 깊게 다가와 좋고, 봄가을에는 계절의 정취가 함께해서 좋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하와이에서 7일 동안도 거의 매일 밤바다 산책을 즐겼다. 여기저기 해변가에 누워 밤바다를 누리고 있는 연인들 사이에 그와 나도 함께였다. 시원하게 볼을 스치는 바다향 진한 바람과 유독 가까운 까만 하늘 위로 가득 세어 나오는 별들의 빛들을 마음 가득 담고 있었다. 4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순간들이 이제 막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던 설렘과 함께 추억으로 빛나고 있다.
속초로 이사 오고 가장 좋았던 점들 중 하나를 꼽자면 밤바다 마실을 자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 오고 한 달 정도 됐을 때이다. 저녁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신랑에게 말했다.
"우리 밤바다 보러 갈까?"
"그래~그러자"
즉흥적으로 정하고 10분도 안돼서 밤바다 마실이 시작되었다. 이 순간 속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외출을 좋아하는 2살 꼬맹이도 밤바다가 좋은지 신나게 걸어 다녔다. 아이와 함께라 해변가에 혼자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지는 못하지만 평일 저녁시간 마음 내킬 때 누리는 밤바다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작은 여행이 된다. 조금 더 미리 계획을 세우고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를 담는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고성 청간해변으로 간다. 주차장 바로 앞에 아담하고 조용한 바닷가가 있다. 평일 저녁에도 관광객이 자주 보이는 속초해변과 달리 거의 우리만 누릴 수 있어 좋다. 모래 해변 따라 몇 걸음걸음 옮기고 파도소리에 귀 기울인다. 몸안으로 쌀쌀한 기운이 비집고 들어올 때쯤 따스한 커피 한 모금 마신다. 달과 별들과 함께면 쓴 커피도 달달하게 느껴진다. 가장 좋아하는 카페와 함께하는 순간이다.
2. 모래 놀이
어렸을 때 추억을 돌이켜볼 때면 놀이터가 있었고 모래도 늘 함께였다. 모래 속에서 동전을 찾는 보물찾기 놀이도 했고, 손을 넣고 모래로 덮어 두꺼비집을 만들기도, 비가 와 고인 모래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놀기도 했다. 유년시절 모래의 촉감은 보드랍게 기억한 편에 저장되어있다. 언제부턴가 놀이터에는 가득했던 모래도, 꺄르륵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사라져 갔다.
강원도 속초에는 동해바다가 주변에 즐비하다. 집에서 도보로 10분이면 속초해변에 갈 수 있고 차로 20분 안이면 다양한 바다를 즐길 수 있다. 두 살 때부터 바닷가 모래와 만나기 시작한 꼬맹이. 입으로 가져가고 코로 가져가며 온몸으로 모래를 느끼면서 어느새 모래와 친구가 되었다. 조개껍데기를 모으고 모래를 퍼 나른다. 물을 뿌렸다가 다시 물통에 담는다. 쌓아진 모래성을 보면 단숨에 부셔버린다. 모래와 함께면 추운 바람도 뜨거운 햇살도 딸아이를 비껴간다. 날이 따뜻해지고부터는 주말마다 간단히 짐을 싸고 바닷가로 향한다. 신나게 모래놀이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뚝딱 흐른다. 간단한 간식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놀기 시작한다.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갈 때면 차 안 시트 바닥에도 꼬맹이의 마음에도 모래가 쌓여간다.
아이와 함께 놀다 보면 자연이 주는 감촉과 유년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 엄마 아빠의 마음에도 쌓여간다.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어른의 시간이 오고, 어느새 엄마가 되었지만 순수했던 7살의 아이로 돌아갈 수 있는 모래의 결이 따스하고 정겹다.
3. 아지트 해변
강원도 속초에 살기 전에 여행을 올 때는 속초해변만 있는 줄 알았다. 속초해변이 가까웠고 찾기 쉬웠다. 그만큼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기도 한다. 이사 오고 1년 넘게 살아보니 이곳 주변에 정말 다양한 해변이 즐비하고 정작 현지인들은 속초해변을 잘 찾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점점 현지인화되어가는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다른 해변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양양과 고성 두 지역 골고루 다녀보았다. 수도권과 거리가 더 멀어서인지 고성 쪽 바다가 속초, 양양보다 더 한산하다. 차로 20분이면 웬만한 고성 바다를 다 가볼 수 있기에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그중에서 지난겨울 우리 가족의 아지트 해변은 고성 청간해변이었다. 고성이 시작되는 입구 쪽이라 가깝기도 하고, 주차장 바로 앞에 해변가가 있기에 추운 겨울 짧은 산책코스로 다녀오기 알맞다. 옆의 아야진 해변보다 아담하기에 사람들도 적고 한적하고 조용해서 애정 하게 되었다.
어느새 속초에서 처음 맞이하는 여름이 되었고 맨발로 청간해변을 걷게 되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신발을 다시 신고 행선지를 옮겼다. 신발에 감춰져 있던 두꺼운 모래의 촉감이 거칠고 따가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린아이 가족단위보다 고등학생 이상의 가족단위나 성인들 무리만 주로 보였다. 아야진, 삼포, 송지호 쪽이 모래가 부드러워 여름에 어린아이들이 놀기에 좋다. 그중에서 아야진은 물 깊이도 얕아서 여름철에는 주말 아침에 가도 주차할 곳이 잘 없다. 우리의 아지트 해변에서 여름을 즐길 수 없게 되자 새로운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고성에 공현진 바닷가이다. 처음에는 1리 바닷가를 가보고 그다음에 2리를 찾았다. 바다 바로 앞에 소나무 가득한 솔밭이 있다. 높은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는 시원했고 맑고 청명한 바닷물은 외국 해변처럼 상큼했다. 좋아하는 나무와 바다를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이 곳에 단번에 반해버렸고 우리 가족의 여름 아지트 해변이 되었다.
올해 초부터 하늘길이 막혀 계획했던 여행을 가지 못했고 답답한 마음이 컸었다. 애정 해변이 뜨거운 더위와 지쳐있던 마음을 시원하게 맑게 안아주었고 그렇게 첫 번째 여름이 흘러갔다.
4. 캠핑과 함께
20대 초반 친한 친구와 기차를 타고 정동진 바다여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초겨울 바닷가 드문 인적 때문인지 마음속 쌓아두었던 답답함 들을 뱃속부터 끌어 오르는 깊고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무엇을 누구를 부르는 것도 아닌, 내 속에 짓누르고 있던 실체를 바다에 토해내듯 질러댔다. 그렇게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그 뒤로 바다가 더 좋아졌다. 자연이 좋아졌다. 아무 소리 안 하고 아무 파단없이 그런 나에게 파도를 보내 바람결을 보내 포옥 안아주는 느낌, 누군가에게 영혼까지 안기는 기분 처음이었다.
그렇게 바다를 자연을 애정 하게 된 나에게 캠핑은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인 행위로 느껴졌다. 신혼 때부터 캠핑을 시작했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둘러싸인 캠핑장을 발견할 때면 값비싼 백을 쇼핑할 때보다 기쁨이 컸다. 수도권에는 캠핑을 즐기는 사람도 많기에 그만큼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원도로 이사 오고 처음으로 찾아본 곳이 백화점, 대형 쇼핑몰 그리고 캠핑장이었다.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이 없어서 낙담한 나에게 주변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캠핑장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수도권에 살 때는 한적하고 자연듬뿍 느낄 수 있는 곳에 가려면 왕복 4시간은 기본이었다. 속초에서는 오래 걸려야 왕복 2시간, 가까이는 30분이면 갈 수 있다. 강릉에서 유명한 연곡 솔향기 캠핑장을 다녀왔다. 명성대로 캠핑장 바로 앞 바닷가로 아름답고 사이트를 둘러쌓고 있는 솔밭도 시원하고 푸르렀다. 넓은 사이트로 간격도 넓어 여유 있게 자연을 충만하게 느끼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솔방울들을 주으며 나뭇가지를 모으고 넓은 곳곳을 누비며 신나게 뛰어 노닌다. 텐트 안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구워 먹는 고기는 더욱더 꿀맛이다. 평소 입 짧은 꼬맹이도 배가 고팠는지 주는 족족 맛있게 먹는다. 저녁 산책길에 해변가에서 터지는 폭죽이 어스름한 하늘 위로 펴져 오른다. 삼삼 오오 즐거운 가족들의 웃음소리도 함께 밤하늘 위로 피어오른다.
봄, 가을에 1박으로 캠핑을 다녔다면 따스한 여름에는 주로 캠핑 피크닉을 다녔다. 삼포해변과 공현진 해변. 삼포해변이 더 넓고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만큼 찾는 사람도 더 많다. 이보다 규모가 작고 편의시설도 다소 불편하지만 한적하고 평온해서 공현진 해변을 더 자주 찾았다. 가벼운 그늘막 텐트와 가벼운 장비들을 챙기고 떠난다. 시원한 그늘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며 구워 먹는 삼겹살은 캠핑 온 듯 즐거움 가득 전해준다. 1박 캠핑과 달리 짐 싸는 것도 철수도 수월해서 당일치기로 즐기기 적당하다. 어느덧 쌀쌀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에 아쉽기만 하다. 내년의 따스한 봄 햇볕이 기다려진다.
5. 체리 바다향
'아무리 좋아하는 바다라도 집에서 매일 바라본다면 금방 질리겠지?!'
속초 바다가 보이는 집으로 이사 온 첫날 든 생각이었다.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뒤 대답은 '아니다'. 매일 같은 모습인 줄만 알았던 바다는 하루하루 다르게 아니 24시간조차 같은 시간 같은 바다를 보여주지 않았다. 새벽 5시부터 동쪽으로 떠 어르는 태양은 바다와 하늘을 달구기 시작한다.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서는 그 빛깔의, 온도의 변화가 신비하고 아름다워 자주 사진에 담고 눈에 담았다. 맑은 날에는 지평선 아래 한없이 고요하고 푸르던 바다도 비가 오거나 태풍이 지나갈 때면 무시 무시하게 부서지고 깨지고 만다. 특히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바닷가에서 넘어오는 운무로 인해 거실 창밖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 한가운데 두둥실 떠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다음날 맑게 개인 하늘 위로 쌍무지개가 뜬다. 바다부터 시작해 하늘 구름 사이 걸터앉은 무지개를 보고 있으니 바다가 예쁜 삔을 꽂은 듯 소녀처럼 예뻐 보인다. 눈 내린 어느 날 하얀 세상과 함께인 너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물결 속 겨울에 서있는 기분이다. 눈을 쌓을 수는 없지만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바다를 그려보며 한겨울의 바다를 마음껏 누리는 시간이다.
매일 같이 밤낮으로 하루를 바다와 함께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속 바라보다 보면 더 잘 알게 되고 더 자세히 보게 된다는 것.
단편적인 모습만 알고 있던 나에게 세밀하고 내밀한 모습부터 및 낫까지 보여준 바다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바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얼굴은 새벽 5시 언저리쯤 불어오는 체리 바다향이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태양의 빛이 잔잔하게 세상을 물들이고 열린 창문 방 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손끝에 어른거리는 새벽의 빛과 체리향이 나는 바닷바람을 볼에 대고 있으면 뱃속까지 다정해지는 기분이 든다. 하루의 시작이 달콤해진다.
바닷가 마을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2살부터 어느덧 3살이 되었고 두 달 후에는 4살이 된다. 바다와 함께 아이가 자라고 있다. 넓고 푸른 하늘을 마음껏 보고 느끼며 바다같이 넓고 맑은 마음을 지닌 아이로 자라길 바라본다. 그와 함께인 엄마 아빠의 마음속에서도 바다의 여유를 담고 느긋하게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