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따지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에서 사는 인생 이런 건 죽을 때까지 못하겠다 싶습니다.
직장 때문에 그냥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사시는 건지 진짜 서울이 좋아서 사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블로그에 요즘 들어 속초 1년 살기에 관해 문의해오는 글들이 늘었다. 주변에서도 속초나 강릉으로 이주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온다. 위 글쓴이 분도 강릉이나 속초로 직장을 옮겨 이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마지막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따라다녔다.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살았었나? 진짜 서울이 좋아서 살았었나?
남편의 경우 결혼 당시 전기 연구원이었다. 여타 회사들이 그렇듯 전기 연구원을 필요로 하는 규모 있는 회사들도 수도권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부산 남자가 경기도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 올라왔고 쭉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의 직장 근처로 신혼집을 구했다(당시 나의 직업은 지역 이동이 편리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권에서의 삶에 의구심이 없었다. 나의 고향 서울 친정과도 가깝고 친구들도 다 서울 또는 경기도에 사니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곳이 좋았다기보다는 다른 선택지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
20대의 마지막 시간들을 호주에서 보냈다. 한국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떠나보고, 혼자서 처음으로 살아본 나라. 아직도 눈에 그려지듯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장면 몇 개가 있다. 평일 점심시간 공원 풀밭에 사람들이 누워 햇살을 즐기는 모습들(한국에서는 주말 한강을 가야 볼 수 있는). 인터넷 AS 받으려면 한 달 넘게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들의 인식(2~3일이 당연했는데), 트램 안 바닥에 주위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철퍼덕 편히 앉아있는 사람들. '여기는 한국과 시간의 속도 자체가 다른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 느긋함이 주는 편안함은 길 위에서도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낮은 하늘에서도 하다못해 가로수 등에서도 묻어 나왔다. 느긋함 속에서 느긋한 사람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일상을 즐기는 모습에서 느껴보지 못한 자유의 냄새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들이 처음으로 내면의 호수에 돌을 던졌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어!
그전까지는 태어나고 살아왔던 '한국'이라는 장소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 아니 '내가 살 수 있는'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 그 경험은 내가 선택한 곳에서 선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또 다른 선택지를 열어주었다. 한국에도 그렇게 안 가본 곳이 많은 서울 촌놈이 세계가 넓다는 것을, 삶의 선택지는 무수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추운 겨울날 귀국해 한 여름의 호주를 그리워하며 이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못 갈 핑계만 쌓여가고 점점 나의 세계는 예전의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주입식 시험에 길들여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그것도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고, 좋은 기업에 취직해야 하고, 좋은 동네(학군 좋은)에 살아야 하고, 아이들은 반에서 몇 등을 해야 하고.....
삶의 단계가 정해져 있고, 단계 속에는 채워야 할 답 마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다양한 옵션은 없고, 보이지 않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룰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대열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룰을 따라 직장 근처 경기도에 신혼집을 구했고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계속되는 남편의 야근 아래 혼자 아이를 오롯이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 회의는 의문으로 변해갔다.
야근이 당연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건가? 서울(경기도 포함)에서 꼭 살아야 하는 건가?
20대의 마지막을 추억할 때마다 함께 빛나고 있는 호주가 떠올랐다. 속초로 여행을 다녀올 수 록 속초에서 호주가 겹쳐졌다. 느리게 흐르는 공기, 한적하게 숨 쉬고 있는 공간들, 낮고 푸른 하늘, 아름다운 자연들까지... 작은 호주가 느껴졌다. 깊은 곳에 각인돼있던 기억의 세포가 다시 피 속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속초에서 지낸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호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소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던 욕망,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호주가 아닌 속초에서 풀게 되었다. 돈보다 시간을 선택했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당연한 삶이란 없다는걸 알게 되었다.
'해가 지는 것을 보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해가 지는 쪽으로 가야 해.'좋아하는 소설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다. 살고 싶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살고 싶은 곳으로 가야 한다.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대형 병원과 자녀 교육 관련해서 다 맞는 이야기다. 속초에는 대형 병원도 없고 서울처럼 학군 좋은 학군도 없고 학원가도 적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맞다고 하더라도 모두의 생이 똑같지 않듯이 생에 '맞다 틀리다 정답'도 없다. 정답이 있는 생이 아니라 선택이 있는 삶을 산다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 번뿐인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