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0일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한 계기는 원룸으로 독립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들고 가서 또다시 사람보다 물건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 방이 되는 게 싫었다. 길었던 맥시멈 라이프가 무색하게 내가 시작했던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건들을 챙길 때 짐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1. 필요하고 없으면 불편한 것
2. 필요하지만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것
3. 원하고 있으면 편한 것
4. 원하지만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것
으로 ‘필요성’과 ‘편리성’을 고려해 네 가지로 분류했다. 여기서 1. 필요하고 없으면 불편한 것과 3. 원하고 있으면 편한 것 두 가지만 챙기기로 했다.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마지막 조건은 1, 3에 해당되더라도 일주일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면 과감히 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한테 정말로 필요한 게 뭔지 물건만 봐도 알게 되고, 이렇게 적은 물건들만 가지고도 생활할 수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쇼핑의 질도 달라진다. 다른 것은 눈에도 안 들어오고 정말 필요하고 원하는 딱 한 가지만 사게 된다. 어차피 다른 건 사봤자 짐만 될 뿐이니까.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장기여행의 짐은 반으로 확 줄었다. 따뜻하지만 무게까지 가볍고 더우면 말아서 부피도 줄일 수 있는 경량 패딩, 바지 2벌, 티 2장, 속옷과 양말, 카메라와 충전기, 작업용 아이패드, 전자책, 요가매트가 전부다. 스노클링이 하고 싶어 스노쿨 장비도 들고 왔는데 이건 여름이 지나면 버릴 계획이다. 나머지 소모품들은 장소 불문하고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없어도 걱정되지 않는다. 모든 짐을 잘 접어서 욱여넣으면 35L 가방의 절반도 채 안 찬다. 이 짐은 그냥 전보다 가벼워졌다는 단순한 목적 달성뿐 아니라 어디를 가든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 것만 있으면 사는데 문제없다는 든든한 의미까지 담고 있다. 무슨 짐에 이런 장황한 의미를 부여하나 싶지만 무겁고 큰 짐을 수십 번 싸고 풀고 반복하며 몇 년간 어깨에 메고 다니게 되면 짐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진다.
지금은 없으면 없는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생활하고 있다. 원룸에서 살 때 하루에 전자레인지만 10번 이상은 써서 어딜 가든 전자레인지가 꼭 필요할 줄 알았는데 또 없으니 없는 대로 살게 된다. 전자레인지는 나에게 2번이었다. 필요하지만 없다고 해서 딱히 불편하지 않은 존재.
하지만 각자의 생활 패턴과 짐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에 내 생각을 강요하진 않는다. 호주 가기 전 비행기 옆자리에 한국인 여자애가 탔었다. 그 여자애는 커다란 캐리어 두 개와 큰 보조가방, 작은 보조가방까지 뭔가를 잔뜩 담아왔다. 혹시나 숙소가 더러울까 들고 온 이불, 배게, 전기장판, 각종 한국 라면과 음식들, 옷장을 통째로 넣은 듯한 옷 무더기들 등 손은 두 개뿐인데 짐은 여러 개라 내가 짐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그 여자애가 들고 온 모든 짐들은 호주에서도 다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짐들이 너무 많아 수화물 추가 요금까지 꽤 지불해서 사실 따지고 보면 호주에서 새 거 사는 거랑 똑같은 셈이 됐다. 내 계산으론 다른 답이 나오는 공식이지만 그 여자애가 한국산 쓰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면 여자애의 답이 정답인 거다.
그래도 딱 한 번만, 거북이처럼 짐을 내가 들고 다니는 집이라 생각하고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물건만 줄여도 많은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물건이 줄어들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기분이 어떤지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