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인생의 과정을 잘 살기
날씨가 너무 좋아졌다. 심지어 어제 비가 와서 미세먼지도 괜찮다. 참 포근하고 따스한 날이다.
얼마 전에 안경 렌즈를 바꿨다. 변색렌즈다. 선글라스 쓴 마냥 길을 걸었다. 덜 눈부시다.
산다는 것은 무얼까? 죽음이란 무얼까? 오늘 산책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시작했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살다 보면 살아있지만 가끔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생무상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오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도 죽음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죽다 살았다고 해서 죽음을 인지한 것인가? 죽음은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죽을 것 같은 순간도 그저 순간이지 죽음은 아니다. 결국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다르다. 죽음은 모든 인지가 사라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죽음은 인지할 수 없다. 적어도 스스로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인지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인지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다. 타인의 죽음으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지 할 수 있다. 언제가 찾아올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영원할 것 같은 생명도 결국 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가는 것인가? 죽어가는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유지하는 것인가? 죽음에 대해 저항하는 것인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끝인가? 새로운 생의 시작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해한 질문 속에서 계속 걸음을 이어갔다. 어찌 보면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살아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있다. 매일 운전을 하고 있어도 나는 살아있다. 매일의 일이 많아도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처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여전히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결론이 아니다. 아직 답이 정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난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왜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까?
무언가 인생의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한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한계들 말이다. 가령 부모님의 재산이라든지, 지금 나의 연봉이라든지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주어진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결국 그 한계 상황 속에서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결론은 죽어야 난다. 인생은 죽음으로 결론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음에도 결론을 내렸다. 주어진 한계 상황 때문에 말이다.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니 인생이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걸으며 느낀다. 송골송골 맺히는 땀에서 느낀다. 살짝 거칠어지는 숨소리에서 느낀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과정 속에 있다. 결론 내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다. 그래야 낯선 손님처럼 다가올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을 살아보자. 먼 미래를 위해 살지 말고, 과거의 어느 날을 복기하지 말고, 오늘의 과정을 잘 살아보자. 그래서 높이 쌓지 말고, 깊이 뿌리내리자. 잘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