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만들기 편
4/13 (삼일 만에 글 하나가 누적이라니! 굴하지 않고 계속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집은 집의 크기에 비해 책이 많은 편에 속한다. 작년에 이사하면서 세어보았을 때 약 300에서 350권 정도 되었다. 그 사이에 책을 더 사고 암스테르담 창고의 책까지 가져왔으니 대략 400권은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책이 많다 보니, 무슨 책이 있는지, 어디에 놓을지 애매해졌다. 집에 디자이너 둘이니, 우리들의 홈도서관을 만들기로 했다. 이 시리즈는 대략 책장(물리적)편과 검색엔진(디지털)편 중 책장 편이다.
홈 도서관, 특히 책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디자인 과정이 필요하다.
1. 사용자의 행동 패턴과 니즈 파악하기
2. 해결해야 하는 문제 파악하기
3. 프로토타이핑
4. 디자인 방향성 결정
5. 디자인 발전
6. 디자인 현실화
7. 그 다음
1. 사용자의 행동 패턴과 니즈 파악하기
책이 많으면 이사할 때마다 골칫덩어리이다. 말 그대로 짐을 옮길 때 책 무게에 힘이 많이 든다. 하지만 책 보다 더 큰 문제는 책장이다. 집을 임대하는 입장에서 책장은 부담스러운 존재다. 집 구조에 따라 놓을 수 있는 책장의 넓이와 높이, 길이가 바뀌게 되기에 공간이 바뀔 때마다 책장도 바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절대 버리지 못하고 어기영차 그 무거운 책을 이고 매번 이사를 다녔다.
여기서 디자인에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은
- 책이 350권-400권
- 이사를 자주 다님
- 책에 애정이 많아 책장이 중요함 (= 장기적 관점을 가질 가능성이 있음)
2. 해결해야 하는 문제 파악하기
최근 새로 이사한 집에 필요한 책장은 구석구석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하지만 너무 크지는 않을 책장이 필요했다.
-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책을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방식
3. 프로토타이핑 (구현과 테스트)
책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즉시, 남편이 40파운드에 12mm 두께의 합판 2장을 배달시켰다. 이 합판은 우리의 첫 번째 책장 혹은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12mm는 책장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얇았고, 만드는 과정에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최소한의 컷팅만으로 만들어야 했다. 섬세한 작업을 하기에는 이웃에게 미안함을 견딜 만큼 우리의 얼굴을 충분히 두껍지 못했고, 목공 도구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책장의 결합 방식과 구조, 합판의 두께, 사이즈를 테스트할 수 있었다.
- 두께는 16-18mm
- 집에서의 가공은 최소화
4. 디자인 방향성 결정
책장이 더 필요했고, 여기서 책장을 만들지 않고 사는 방법도 고려하였다. 다양한 사이즈를 제공하는 이케아에서 저렴한 책장을 일단 구매하고 이사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버리고 새로 이사하는 집에 맞게 다시 사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케아 가구는 학생 때 너무 많이 써서 그때 시절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으며 이케아 특유의 마감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나무 느낌의 가구로 우리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제 우리 돈도 버는 사회인이 되었으니, 조금 더 투자해서 좀 더 장기적으로 생각하여 오래 쓸 가구에 투자하자고 했다. (물론 환경에도)
우리 집에는 남편이 본인의 디제잉 방식에 맞추어 디자인하고 만든 디제이 덱 deck을 위한 가구가 있었다. 합판으로 만든 이 가구와도 잘 어울릴만한 책장이면 좋겠기에 자작나무 합판을 선택했다. 자작나무 합판은 꽤 높은 등급의 나무로 충분히 부드러웠다. 그리고 최상의 나무보단 좀 더 저렴했다.
이사를 가게 되어도 어떤 공간이든 그에 맞게 유동적으로 놓을 수 있을 책장이면 했다. 동시에 추가로 책장이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지 새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추가된 책장이 기존의 책장과 이질감이 나지 않고 기존의 책장과 잘 어우러졌으면 했다. 더하여, 이사할 때 책장을 이동하기 쉽도록 벽에 고정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하며, 분해 조립이 용이해야 했다.
즉슨,
- 기존 가구(자작나무 합판)와 잘 어우러질 것
- 언제든지 추가로 만들 수 있을 것
- 조립과 분해가 용이할 것
- 이케아보다 비싸도 장기적으로 생각하여 추가 금액을 지불할 의사가 있음
5. 디자인 발전
위의 모든 사항들과, 테스트한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참고하여 디자인 조건들 취합하여 책장의 디자인과 제작 방법을 선택하였다.
제작방법: 조금은 게으르고 가공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합판 CNC 커팅 방식*으로 나머지 책장을 만들기로 했다.
*CNC 커팅 방식 : 컴퓨터로 평면을 납작한 재료를 절삭 가공하는 방법
책장의 형태: 폭은 모두 동일하지만, 길이는 조금씩 다른, 두 가지 높이의 책장 3개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3D 모델링하고 CNC 컷팅할 수 있도록 모두 평면화하였다
6. 디자인 현실화
디자인을 굳히는 동시에 CNC를 할 수 있는 곳과 커팅 후 배달받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런던 남쪽의 팹랩 Fab Lab을 뚤레뚤레 찾아보던 와중에 남편의 친구가 예전에 일했던 CNC 커팅을 하는 곳을 소개해주었다. 재료비와 배달비는 생각보다 비쌌고, 커팅비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커팅 파일을 제작하여 담당자와 2-3번 파일을 교환하며 어차피 판재 3장 사는 거 남기지 말고 다 쓰자며 집안 곳곳을 뒤져 필요한 크고 작은 가구들을 추가로 만들고 책장 크기도 수정하였다.
일주일 후 커팅된 조각들이 도착하였다. 조각들을 조립하고 나사로 고정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멀렛 헤머*로 조각들을 맞추어도 충분하여 조각들을 끼워 맞추었다. 완성!
*멀렛 헤머(mallet hammer): 고무나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둥근 머리를 가진 망치
이렇게 정리하니, 괜히 디자인 과정을 따라 만든 느낌이다. 오랜만에 3d로 실제로 만드는 작업도 하고 마침 학생들에게 분산형 디자인 (Distributed Design)*을 가르치던 참에 괜히 더 재미있었다. 끝.
*분산형 디자인 (Distributed Design) : 디지털 제작 기술(CNC, 3D 프린팅, 레이저 커팅 등)을 활용하여, 로컬에서 생산 가능한 네트워크 기반의 생산 방식
7. 그 다음
이 다음에 만든다면, 아마 16mm로 중간을 만드는 것이 더 저렴할 듯하다. 물론 몇개를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폭은 더 줄여도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 폭으로 계속 제작하는 수밖에. 서랍과 선반 문이 달린 칸도 필요에 따라 재미있겠다.
오랜만에 뚝딱 뚝딱한 이야기. 끝
이 시리즈의 다음 편은 홈도서관의 디지털 편, 검색엔진 만들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