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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Apr 23. 2023

당신의 방문이 곧 축제인 섬

가파도 청보리축제

  여기, 당신의 방문이 축제가 되는 섬이 있다.  


  가파도 청보리 축제 기간에는 배편 예약이 빠르게 차는 편이다. 온라인 예약으로 미리 표를 구하지 못했다면 현장판매를 노려야 하는데, 이 또한 오전에 매진되는 경우가 많기에 일찍 가야 한다. 오전 7시에 잠이 덜 깬 채로 하품을 해 가며 택시에 올라탄 이유다. 가파도행 배가 출발하는 모슬포에 도착하니 창구 오픈 시간인 오전 8시도 되기 전인데도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가오리 모양의 섬, 가파도는 2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다. 걸어서 1-2시간이면 섬을 모두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빠르게 섬을 돌아보고 나갈 수 있도록 가파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할 때 돌아오는 배를 동시에 예약하게 되고, 축제 기간에는 단 두 시간 정도가 최대다. 들어온 사람은 두 시간 내로 섬을 돌아보고 다음 사람을 위해 빠르게 빠져 주는 원리랄까.


 여행을 가면 안 그래도 새벽부터 일어나 돌아다니는 게 K민족인데 두 시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주어지니 결연한 태도가 되었다. 두 시간 동안 모든 걸 해야 했다. 더구나 나는 축제를 3일간 지켜봐야 겨우 글 세네 편을 써내고 앓아눕는 사람이다. 두 시간이면 글 두 문단 짜리 밖에 쓸 수 없다는 말! 아무튼 두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했다.

 

  그런데 섬에 도착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 갔던 축제들과 달리 현수막도, 일종의 소란스러움도 없었다. 지금이 축제 기간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은 항구 근처에 세워진 소방 의용군 천막 하나뿐이었고, 다가가서 "청보리 축제 행사 하는 것 맞나요?" 물어보니 어색한 미소로 "잘 모르겠어요"라는 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가파도 항구 근처에는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가파리 마을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소금기 가득한 바다 바람을 매일같이 맞아 수명보다 빠르게 노쇠한 자전거를 빌리며 축제 관련 질문을 던졌지만 따로 마련된 프로그램이나 별다른 행사는 없는 듯했다. 어쩐지 정보를 찾기 어렵더라니.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파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맑은 날씨의 도움으로 파란 바다와 청보리의 싱그러운 초록빛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돌담길을 중심으로 한 쪽에는 유채꽃, 다른 한쪽에는 청보리가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뒤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어 탄성을 자아냈다.



  축제 기간의 가파도에는 단체 관광객도 많았다. 어디선가 "갈치~"하는 선창에 여러 명이 "대가리~"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중년의 단체 관광객이었는데, 동창회로 함께 여행을 왔다고 했다. "갈치 대가리가 뭔가요?"하고 묻자 깔깔 웃으며 "사진 찍을 때 스마일 대신 하는 말이에요!" 하는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제주 하면 갈치지! 사진 찍을 때 웃음 짓게 하는 말로 '치즈'와 '김치'가 아닌 '갈치 대가리'라는 토속적인 단어를 쓸 수 있었다니.


  큰 영감을 받아 그 시간 이후 '갈치'와 '대가리'를 외치며 청보리밭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기도 했는데 곳곳에 그려진 벽화가 눈에 띄었다. 벽화와 함께 적힌 내용을 읽다 보니 가파도에 대해 몰랐던 점들을 알 수 있었다. 가파도에 위치한 가파초등학교는 매년 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는 것,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가파도를 거쳐갔다는 것, 섬에 고인돌 군락이 있다는 것. 이 작은 섬이 하고 싶던 이야기가 어찌나 많은지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길목마다 벽화가 조잘조잘 말을 걸어왔다.


   잠시 짬을 내 가파도 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카페 공간에 닿았다. 가파도 청보리로 만든 미숫가루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카페에서만 판매한다는 맥주를 주문했다. 청량한 목 넘김과 쌉쌀함을 자랑하던 맥주와 고소한 미숫가루를 마시며 "청보리로 만들어서 그런가 맛있다...!" 하고 외침과 동시에 깨달았다. 아니 잠깐... 맥주랑 미숫가루는 원래 보리로 만들잖아?


  사실 청보리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보리가 노랗게 익기 전 싱그러운 초록 잎을 단 보리를 청보리라고 부른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푸르던 보리가 금방 연두색으로 연해졌다가 노랗게 익어가기에 청보리 축제 기간에 방문해야 온전히 푸른 보리를 볼 수 있다. 그나저나, 원래 보리로 만드는 음식에도 '청보리'라는 이름을 붙이니 특별해 보였다면 이건 성공적인 브랜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카페를 나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이번에는 사진 찍을 장소를 찾아 헤맸다. 제주도 본섬에서 배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기에 맑은 날 가파도에서는 한라산 봉우리와 볼록하게 솟은 제주의 오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돌아가는 배편을 탈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이 커져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한 시간 같았던 두 시간이 지나고 제주도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전 청보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들뜬 모습으로 섬에 막 도착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특전사 12기 영원한 특전맨들!'이라고 고딕체로 적힌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던 아저씨들, 청보리 막걸리 세트며 미숫가루를 잔뜩 구매해 들고 다니던 사람들의 표정에 들뜸과 기쁨이 가득했다. 축제하면 생각나는 천막이며 푸드트럭,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 등이 하나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은 여타 축제장에서 보던 모습들과 비슷했다.


  집에 돌아와 청보리 축제 행사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나서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축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파도 특유의 돌담 사이로 펼쳐진 청보리밭 걷기 체험', '가파도 역사문화 탐방(고인돌 군락지, 상동우물, 상동마을할망당, 불턱 등)', '포토존 운영'이 축제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가파도의 돌담길을 걷고, 청보리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마을의 벽화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축제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셈이다.


  작은 섬이 처한 상황이 으레 그렇듯 가파도도 지역 소멸 문제를 겪고 있다. 일손은 갈수록 부족해지고, 보리 수확에 드는 비용도 비싸져 청보리 밭 면적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청보리 축제를 열기 시작한 것도, 마을회에서 자전거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고 마을 기업에서 청보리로 만든 맥주와 미숫가루를 판매하고 있는 것도 모두 당신의 방문을 위해서다. 그러니 노쇠한 자전거를 기쁜 마음으로 빌리고, 섬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청보리 미숫가루며 주전부리를 사 먹는 것이 곧 축제였던 것이다.


여기, 당신의 방문이 축제가 되는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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