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축제자랑』을 오마주 하며.
책 『있으려나 서점』를 읽으며 꽂힌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 '무덤 속 책장'이라는 개념인데, 죽은 후 무덤 옆에 작은 책꽂이함을 놓고 평생 그 사람이 좋아하던 책을 넣어두는 것이다.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가져가 읽으며 죽은 사람은 추억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가져다 둬서 서로 교환을 할 수도 있다.(물론 그 책을 다시 돌려받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 후로 나는 메모장에 비밀스럽게 내가 죽은 후 내 '무덤 속 책장'에 비치해 둘 책들의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기준은 두 가지로 내가 아주아주 재밌게 읽은 책이거나,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이어야 한다는 것. 김혼비‧박태하 작가의 『전국축제자랑』 은 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흔치 않은 책이다. 첫 단락을 읽으며 이미 유서에 이 책을 무덤 속 책장에 꼭 넣어달라고 적는 것까지 상상했으니 말 다했다.
제주 여행 중 들린 책방에서 사장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책을 집어 들었고,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창 카페에서 그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낄낄거리며 책을 읽었다. 사진 한 장 없이도 축제의 혼잡한(?) 현장이 상상되는 필력과 작가님의 표현대로 "어떤 종류의 끈적끈적함과 어떤 종류의 매끈함이 세련되지 못하게 결합한 'K스러움'"이 범벅된 축제장에 덩그러니 놓인 듯한 아찔한 감정묘사까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유머러스하게 승화해 내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의 민족다운 유머감각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짜릿했다.
그 후 책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꺼내 보곤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나만의 '소확행' 방법이었다. 2년째 이 부부 코미디언단을 남몰래 흠모하며 언젠가 나도 이런 글을 쓰겠다는 소망을 가져왔는데 제주에 내려와 그 마음이 점점 커졌다. 제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품고 있다. 한라산과 귤과 돌하르방과 말과 해녀의 섬이자 1만 8천 신들의 섬인 제주. 제주의 다채로운 자연과 문화 자원과 선택지 없이 고립된 사람들이 마음속에 키워온 신들에 대한 믿음은 섬에서 샘솟아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는 용천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한다. 제주에 내려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주말마다 해녀 축제며 방어 축제, 프랑스 영화제와 청년의 날 행사에 참여하러 쏘다녔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주례사처럼 엔딩곡에 춤추고 노래하기를 세 번째, 자신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내뿜던 해녀들의 공연에서부터 방어축제의 낡은 천막이 바람에 나부끼는 곳에서 축제고 뭐고 뿔소라에 소주를 마시며 세상을 논하던 아저씨들까지. 『전국축제자랑』 속 한 장면 같은 기시감이 드는 모습들을 마주하며 『전국축제자랑』 의 제주도 버전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방문할 제주의 축제에 대해 알아보고 『전국축제자랑』 책을 다시 들춰보니 '원조'들의 유-머에 넘어서기 힘든 높은 벽을 느껴 잠시 의기소침해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김혼비 작가가 책날개에 쓴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들만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는 말처럼, 내가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이니 천천히 써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