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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혹의 우뇌 May 06. 2017

"더 늦기 전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을 꼽으라면, 클래식과 록, 팝, 재즈, 크로스오버 등 모든 분야를 통틀어 주저 없이 꼽는 사람이 있다. 지난 2014년 의료사고로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크롬(Crom), 그룹 넥스트(N.EX.T)의 리더 신해철이다. 모든 음반을 구매할 정도로 열성적인 팬이었고, 항상 흥분된 마음으로 참여했던 거의 모든 그의 콘서트도 아직 뇌리에 생생하다. "지속 가능한 발전", "녹색경제", "기후변화"등의 주제에 지난 10년을 걸고 일을 하다, 어느새 불혹을 넘긴 지금도 가끔, 여전히, 그의 노래를 듣고 있다.


그러니까 펜을 들은 이유는 우연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터의 주제인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해 어떻게 쉽게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불현듯, 얼마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그의 이력이 생각난 것이다. 황급히 검색을 했다. 1992년 환경부의 주최로 열린 내일은 늦으리 콘서트. 그리고, 다행히 찾을 수 있었던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이 노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992년 신해철을 중심으로 뭉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


도입부부터 압도적이다.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지난 세월, 앞만을 보며 숨차게 달려 여기에 왔지.”


그룹 "봄여름 가을 겨울의" 리드 기타리스트이자 메인 보컬인 김종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걸쭉한(!) 음색에 가사에 어우러져, 우리 산업화 역사의 애환을 압축하고 있는 것만 같아 뭉클한 느낌까지 있다.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앞만을 보며 숨차게 달려", 이 표현들에 밑줄을 긋고, 환경과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개인사까지 투영하여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압축적인 가사다.


그리고는 신해철의 파트가 흘러나온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제 여기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네.”


개발 일변도의 경제성장 정책과, 그로 인해 의사결정에서 항상 뒷전이었던 환경/사회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음악인 신해철의 시대 감각과 절묘한 사회문화적 이해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노래가 발표된 때는 1992년이었다. 그 당시 1992년 리우회의*를 기념하는 환경부의 기획으로, 혹시 대통령의 지시로 이 노래가 만들어졌는지는 개인적으로 확인된 바 없지만, 정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만든 ‘건전 가요’라고 하기에는 작곡가의 컨택스트 이해 수준이 너무 높다.

(*리우회의: 1992년 6월 개최된 환경 개발회의 (UNCE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를 지칭한다. 흔히 리우 정상회의로 불린다. 당시 세계정상들이 모여 유엔 기후변화 협약(UNFCCC,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에 서명했으면, 20여 년이 지난 2015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전 세계 국가들이 구속력 있는 합의를 맺은 '파리협정 (Paris Agreement)'의 모체가 됐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았다는 거다. 작품 뒤에 환경부 국장과 신해철의 밤샘 토론이 있었는지, 가사를 환경부 혹은 외교부의 유능한 사무관과 함께 검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해철의 예술가적 기질을 고려했을 때,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작품의 결과물은 그렇게 깊다. 클라이맥스 파트에서는 가수 신승훈, 이승환, 김종서 등이 화려한 ‘스캣(scat)’ 창법을 마음껏 과시하고, 서태지와 아이들도 나름 조용히, 그리고 엄숙히 랩을 한다.


“그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담게 해주오.”



노래가 만들어지고 16년이 지난 2008년, 대한민국은 “국가 녹색성장계획”을 발표하고, 저탄소 녹색성장법을 제정하는 등 환경친화적인 개발을 모색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사실 그전에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만든 적이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녹색 영웅으로 평가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내적인 시각으로 보면 참 복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녹색성장의 본질적 개념을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채 만든 4대 강 사업, 특히,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선시즌에 물려 논의가 된 석탄화력발전소 증설/폐기 문제만 보더라도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참조: Planet B는 없다). 근래 대두된 미세먼지 문제도 우리의 현재를 함축한다. 사실 이 모든 결과는 자연을 유한한 자본(capital)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녹색성장, 기후변화 등의 이야기는 전문적인 이야기이지만, “더 늦기 전에”를 YouTube 영상을 통해 보고 듣는다면, 왜 우리가 이 주제를 논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환경과 경제성장을 논하기에 앞서 가져야 할 심미적 감상에 대해 이 노래보다 쉽고 간결하고, 그리고 품격 있게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한 국내 대중가요, 아니 예술 작품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숨겨진 명곡 중에 명곡이다. 대선 후, 어떤 후보가 당선되든 간에 미세먼지 대응책을 비롯해 환경과 지속 가능한 발전 문제는 국가의 우선순위 정책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적절한 때에, 이 노래가 쓰이기를 바란다. 25년 전 발표된 노래라는 것이 놀랍고, 또 이런 음악을 만들어 줘야 할 신해철이 이제 없다는 것도 안타깝다. 평생 팬으로서 협업이라도 제안했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1992년 만들어진 '내일은 늦으리" 음반 커버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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