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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Sep 11. 2023

나의 루틴 만들기

퇴사 후 나와의 약속


퇴사 후 나 자신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바로 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돌보기. 이 프로젝트의 큰 2가지 과제는 직접 지은 농작물 또는 유기농 농산물로 집밥 차려먹기, 그리고 꾸준한 운동이다.


풍파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몸과 마음을 충분히 돌보는 것이었다. 내가 약해지면 주변의 목소리에 흔들리기 쉽다.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외쳤으면서 내 중심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퇴사 후 제2의 인생 장기 계획, 그 첫 번째 계획은 당연히 나를 돌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요즘 나는 한 끼 차려먹는 과정이 꽤 길지만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사회에서 나의 몸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음식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앞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건강해지면 노후 또한 건강해지고, 아파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끔찍한 삶을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동안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소진되는 업무 끝에 밥을 차려먹을 힘이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한 끼 식사에 2시간을 투자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회사 점심시간에 고작 20분 밥 먹기, 나머지 시간은 휴식, 그리고 퇴근 후 집에 가면 배달음식 또는 간편 식품. 이런 악순환의 반복이다. 무엇을 먹느냐와 얼마나 정성스럽게 먹느냐의 문제는 내 중심을 잡고 뿌리를 단단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악순환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고 싶었다. 기존의 반만 벌고, 작게 농사를 지으며 반은 자급하기. 남은 시간은 나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시간으로 투자하기. 요즘 떠오르는 반농반X의 삶이다. 이 실험이 성공적이라면 시골에서도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매년 1회 정도는 해외 여행을 다니며 일하는 노마드의 삶에 대한 가능성도 꿈꾸고 있다.


지난 2년을 돌이켜보니 이 목표를 꽤나 많이 달성해서 놀랐다. 최근에는 계속 더 높은 목표, 더 먼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왜 이렇게 느리고 진전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지치는 날이 많아졌는데, 내가 이루어왔던 것 또한 기록하며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순서대로) 표고버섯덮밥, 볶음야채 덮밥과 된장국, 월남쌈재료, 부추페스토 볶음밥과 애호박구이, 두부면잡채, 애호박 비빔국수, 두부만두와 만두속 부침과 콩나물냉국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이 집에서 해 먹고 더 적은 인스턴트식품을 섭취하고 있다. 라면과 비빔면에 의존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조미료 맛이 질리기 시작했다. 남편도 나도 외식을 하면 처음 몇 입은 즐겁다가도 마지막은 '역시 집밥이 최고지' 하며 마무리한다.


동물성 식품을 끊고, 현미 위주의 채식을 하니 몸이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가끔 밥 든든히 먹고 바로 누워버릴 때를 제외하고는 속 쓰릴 일이 없어졌다. 화장실에 가는 일이 많아 밖에선 조금 불편하지만, 밥을 먹자마자 뱃속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활발한 장 운동으로 인해 변기가 자주 막힌다(이는 조금 난감한 일이다). 피부에 여드름은 더 이상 나지 않았고, 만나는 친구들마다 피부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있다. 단순히 여드름이 나지 않는다기 보다는 피부의 결이 좋아진 것을 느낀다. 많이 먹어도 살이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옆구리와 허벅지 안쪽같은 군살이 사라졌고, 이는 정제 탄수화물을 줄이고 요리할 때 기름도 최소화하고, 천천히 먹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현미밥을 먹으면 그 식감이 거칠기에 자연스레 더 꼭꼭 씹어먹게 된다. 충분히 씹지 않고 삼켰을 때 속 쓰림이 나타났던 것을 떠올리면 오랫동안 씹게 된다. 밭에 나는 채소들로 하는 반찬은 주로 나물 또는 장아찌이다 보니 섬유질이 질긴 식물들이 있기에 이 또한 오랫동안 씹어서 먹어야 한다. 자연히 천천히 먹는 습관이 생겼고, 먹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요리하고 먹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의 시간이 걸린다. 식탁을 찍어서 SNS에 포스팅까지 하고 나면 만족도 또한 최상이다. 점점 요리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보이고, 다양한 식재료를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채식을 하기 전에는 나도 '고기 없으면 뭐 먹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세상에 식물들은 정말 다양하고, 마트에서 팔지 않는, 밭에서 제철에만 구할 수 있는 야생 식물들도 한가득이다.




채식을 하면서도 근육이 늘고 체력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운동을 꾸준히, 점점 더 늘려갔다. 처음에는 주 2회 필라테스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주 3회 수영, 월 1~2회 풋살을 하고 있다. 수영을 기초부터 시작했던 1년 전은 매우 힘들었다. 워낙 체력이 안 좋았던 것은 물론, 지루하고 힘든 유산소 운동을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던 사람이었다. 25미터 레인에서 반도 못 가고 쉬기 일쑤였다. 약 50분의 수영이 끝나고 나면 체력이 다 소진된 기분에 나른함까지 더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영 후 낮잠은 꼭 필요한 루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영이 끝나도 조금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 이르렀다. 자유형 기준 25미터 레인 두 바퀴, 100미터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도 돌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더 갈 길이 멀지만..)


풋살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나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했다. 달리기, 공놀이 등의 운동을 죽도록 싫어했던 나였다. 풋살을 해볼 용기를 냈던 것은 회사 친구의 초대와 축구광 남편의 응원이었다. 회사 친구가 지인들로 이루어진 풋살 팀에 들어갔는데, 정말 힘들지만 그만큼 재밌고 체력쓰레기인 본인도 할 수 있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처음 나갔던 풋살은 역시 생각처럼 무척 힘들었다. 조금만 달려도 폐 속 깊이 숨을 쉬어도 숨이 차고, 귀가 먹먹해졌다. 다음 날엔 허리 아래로 모두 알이 배겨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누가 찍어준 나의 영상을 보면 분명 죽을 듯이 달렸는데 나는 너무 느리고 열심히 달리는 것 같지 않아 보여서 스스로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지금은 풋살이 끝나도 폐가 아프다거나 온몸에 알이 배겨서 걷기가 힘들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제 월 1회 하는 풋살을 2회로 늘려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고 있다.


고등학생 때의 나를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루틴이 되어버렸다. 그때는 체력이 안 좋은 것이 뭐 그런 사람도 있지 정도로 치부되었다면, 30대가 된 지금은 체력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체력이 좋아진다는 것은 그저 몸이 좋아진다는 것을 넘어서 어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기본을 다지는 과정이다.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달성하려면 이것도 배워야 하고 저것도 배워야 하고, 이 일, 저 일, 사소한 일 하나하나 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체력이 좋지 않다면 의지도 약해지고 덩달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우울해진다.


나를 갉아먹는 회사라는 구조에서 벗어나 나의 인생을 아래부터 차곡차곡 쌓아가기. 집을 짓는다면 나는 이제 초석을 놓은 것이 아닐까. 기초 구조가 탄탄하면 외장재가 조금 떨어져 나가도 금방 보수가 가능하듯이, 인생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나를 돌보는 작업을 했던 것은 아무래도 앞으로의 발돋움을 위한 탄탄한 발판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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