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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13. 2024

단식 열한 번째 날

인생은 5첩 반상

단식 열한 번째 날, 보식 5일 차.

아침은 어제 남은 팥죽과 물김치, 된장국, 마늘장아찌 2알.

오늘부턴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늘어난다. 고춧가루와 기름기가 없는 생채소 위주의 반찬이라면 가능하다. 집에 남아있던 마늘장아찌가 먹고 싶어 꺼냈다. 마늘의 알싸한 매운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고작 두 알인데 몇 번에 나누어 겨우 먹었다.


단식 11일 차, 보식 5일 차 아침


오늘 아침에는 타이밍 좋게 어글리어스(Uglyus, 못난이 농산물 꾸러미)가 도착했다. 그제 망원시장에서 장 본 야채들과 제주에서 온 당근, 오늘 온 야채박스의 야채를 총동원해 어떤 반찬을 만들지 고심했다.


1. 간장 무조림

겨울이면 추위를 견디고 자란 무의 맛이 달달해진다. 이때의 무는 그냥 씹어먹어도 맛있다. 허벅지만 한 큰 무를 하나 사 오면 내가 좋아하는 무조림이랑 남편이 좋아하는 무생채를 넉넉히 만들 수 있다.


(1) 무를 큼직하게 깍둑 썰어서 냄비에 넣는다.

(2) 무가 잠기도록 물을 채우고, 표고버섯과 다시마를 넣는다.

(3) 간장 1 국자, 올리고당 약 3T 정도 넣는다. (간을 보며 양을 조절)

(4) 다진 생강을 1/2T 넣는다.

(5) 중불에 오랜 시간 졸여준다.


나는 (3)에서 간장을 줄이고 냉장고에 있던 펜넬장아찌와 자소엽장아찌 국물을 한국자씩 넣었다.

그리고 집에 아까시 꽃 효소를 만들고 남은 건더기가 있어 추가했더니 아까시 꽃의 향기가 집 안 가득 퍼진다.

국물용 다시마와 표고버섯은 버리지 않고, 잘게 썰어서 다시 넣어주면 음식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


간장 무조림


2. 당근콜라비배추 초절임

제주에서 온 당근과 콜라비, 그리고 배추도 겨울의 제철 채소로 달달한 맛이 좋다.


(1) 당근과 콜라비, 배추를 먹기 좋게 채 썬다.

(2) 소금, 비정제 설탕, 식초 1t씩 넣고 절여준다.

(3) 머루 발효식초 3T, 비정제 설탕 2T, 소금 1t를 섞어서 양념을 만든다. (취향에 맞게 양 조절)

(4) 절인 야채의 물기를 빼고 양념을 섞어서 잘 버무려준다.


머루 발효식초와 설탕 대신에 다른 과일청과 식초를 넣어도 가능하다. 원래 참고한 레시피에는 오미자 효소를 사용했는데, 나는 집에 있던 식재료를 활용하느라 머루 발효식초와 설탕을 사용했다.


남편이 먹을 무생채와 나의 당근콜라비배추 초절임


3. 김자반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비타민 B12를 제공하는 해조류는 항상 집에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식재료이다. 하지만 현재 기름을 먹지 못하니, 양념김 대신에 생김을 사용하였다.


(1) 생김 10장을 후라이팬에 앞뒤로 구워준다. 생김은 보랏빛이 도는 반면, 구워진 김은 초록빛이 돈다.

(2) 김을 손으로 잘 부숴서 먹기 좋은 크기로 만든다.

(3) 그릇에 진간장 2T, 다진 마늘 1/2T, 올리고당 2/3T, 들기름 1T를 넣고 잘 섞어준다.

(4) 부순 김을 양념에 섞고 버무려준 뒤, 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나는 처음에 기름을 넣지 않고 만들었다가, 올리고당 대신 사용한 조청이 잘 풀리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기름을 살짝 넣어주었다. 취향에 따라 식초도 살짝 넣어주면 새콤한 맛이 가미된다.


4. 오이고추 된장무침

매운 고추를 먹지 말라고 해서 오이고추는 괜찮겠지 하며 만든 간단한 반찬인 된장무침.


(1) 오이고추를 한 입 크기로 썰어준다.

(2) 된장 1T, 다진 마늘 1/2T, 올리고당 살짝 넣고 버무려준다.


대체로 고추장과 참기름도 들어가지만 넣지 않아도 충분히 맛이 좋았다.


단식 11일 차, 보식 5일 차 점심


그렇게 정성을 다해 차린 점심. 밥 2/5 공기, 낫토와 두부 한 조각, 무조림, 김자반, 오이고추 된장무침, 자소엽 장아찌, 당근콜라비배추 초절임, 된장국.

양은 적지만 오랜만의 푸짐한 식사에 입 안에 축제가 벌어진 듯하다. 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며 순수한 먹는 행복을 즐겼다. 두부의 담백한 맛, 낫토의 감칠맛, 자소엽 장아찌의 새콤한 맛, 콜라비와 당근의 아삭함, 무조림의 부드러움과 향긋한 아까시 꽃 향, 김자반의 고소한 맛, 된장국의 구수하고 씁쓸한 맛.


식사 시간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이 정도면 나의 모든 활동은 먹기 위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벌어서 먹고, 여행을 가서도 먹고, 사람들을 만나서도 먹는다. '먹기'로 모든 것이 연결된다.


단식 11일 차, 보식 5일 차 저녁

저녁도 점심과 동일한 반찬에 물김치만 추가하였다. 후식으로 먹기 위해 망원시장에서 사 온 딸기를 씻었다. 신 맛이 있는 다른 과일은 위에 자극이 갈 수 있어서 단식 기간이 완전히 끝난 후 먹으라고 한다. 하지만 토마토와 딸기, 그리고 바나나는 채소이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랍고 기뻤다. 다년생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과일이지만, 땅에서 자라는 일년생 초본류의 열매는 채소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토마토, 딸기, 바나나 모두 1년생이다. 단식 기간 동안 달달한 과일이 끊임없이 당겼던 나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딸기 3알과 바나나 1개를 후식으로 먹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한정식을 좋아했다. 10가지 이상의 반찬이 쭉 나오며, 밥 한 술을 뜰 때마다 이번엔 어떤 반찬을 곁들여 먹을지 선택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 반찬, 저 반찬 조합도 해보고 쌈도 싸 먹어보며 다채로운 맛의 조화를 음미했다. 그러면서도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얼마나 고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수많은 반찬이 올려져 나오는 그릇을 설거지하는 일은 고역일 것 같다. 나는 식당을 하지도 않을 거니와 절대로 한정식 집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비건을 하면서, 그리고 사찰 음식을 배우면서, 이번에는 저자극 자연식물식을 하면서, 우리 집 밥상은 거의 대부분 5첩 이상의 반상이었다. 더욱이 김치와 기름에 구운 요리가 없으면 밥상이 재미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식 후 살아난 미각은 내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자연식물식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한 상차림이 가능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는 요리도 싫어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주로 먹는 사람이었는데, 내 인생도 5첩 반상처럼 다채로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먹거리에 진심이라면, 한 20년 후의 나는 어쩌면 자연식물식 한정식 집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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