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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12. 2024

단식 열 번째 날

행복이란 무엇일까

단식 열 번째 날, 회복식 4일 차.

새벽 다섯 시 반, 수영장에 갔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정말 갈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했다. 수영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평소와 같이 강도 높게 하면 못 따라갈게 뻔했다. (평소에도 줄 맨 뒤에서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다)

조금이라도 하다가 나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수영장에 갔다.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셔서 오늘은 자유수영을 하라신다. 다행이다. 설렁설렁 쉬엄쉬엄 하면 되겠다. 그런데 웬 걸, 분명 자유수영인데 항상 1등 자리에 서는 분이 리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자유형 5바퀴 갈게요, 접-자(접영자유형) 3바퀴 갈게요, 배영 3바퀴 갈게요."


그리고 사람들은 별말 없이 잘 따라했다. 선생님은 중간에 쉬면서 설명이라도 해주는데, 설명이 없으니 그냥 계속 뺑뺑이다. 맨 뒤에서도 자꾸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서 중간중간 사람들을 보냈다. 그러다가도 힘이 들어서 5분을 남기고 먼저 나와버렸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죽도록 싫어했다. 학교에서 체육 시간이 가장 싫었고, 고등학교 때 최악의 시험은 체육 중간고사인 10km 마라톤이었다. 이렇게 힘든 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워낙 생각이 많고 정적인 성향이라 쉴 때는 누워있기, 책 읽기, 영화 보기처럼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잠도 많고 행동이 느려서 가족들 사이에서 별명이 '늘순이'였다. 


2,30대가 되면서 내 삶을 직접 꾸려나가면서 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체력은 떨어져서 의욕이 나지 않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마음은 벌써 저 앞까지 가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때부터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요가, 필라테스, 1:1 PT, 각종 그룹운동 등등을 전전하다가 겨우 재미를 붙인 것이 풋살과 수영이다. 


단식 기간 동안 근육이 많이 손실되지 않으려면, 매일 산책이나 등산 등 운동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힘이 없을 때 본능이 살아난 나는 타협을 많이 했다. 오늘만 쉬고 내일은 좀 걸어야지. 추우니까 공원 한 바퀴만 걷다와야지. 일주일 만에 간 수영이 힘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운동을 죽도록 싫어하던 내가 매일매일 나와의 싸움을 벌이며 운동을 다녀오면 참 뿌듯하곤 했다. 


단식 10일 차, 보식 4일 차 아침


오늘부터는 죽에 채소나 미역 등을 넣어도 된다. 사실 말을 듣지 않고 어제부터 팥죽을 먹긴 했지만, 오늘은 당당하게 채소죽을 먹어야지. 


아침은 당근죽 4/5 공기, 물김치, 된장국.

제주에서 주문한 무농약 당근이 한 박스 가득 왔다. 당근을 잘게 큐브모양으로 썰어 물에 끓이다가 남아있던 쌀죽을 넣었다. 당근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달달하고 맛있다. 유기농 제주당근이라 유난히 단 것인지, 내 미각이 살아나서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밋밋한 쌀죽과는 차원이 다르다. 식감도 다채로워져서 기분이 좋다. 물에 익히긴 했지만 그래도 살짝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맛있다고 꿀떡 삼켜버리지 않도록 숫자를 세며 씹는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당근죽 한 숟가락에 대략 오십 번은 씹은 것 같다. 스무 번 이상은 씹어야 좋다고 하는데, 의식하면서 음식이 다 분해될 때까지 씹으니 그 정도 되었다. 자연히 식사 시간이 느려졌다. 



단식 10일 차, 보식 4일 차 점심과 저녁


점심, 저녁은 팥죽 4/5 공기, 물김치, 된장국.

팥죽에 설탕을 치지 않았는데도 달달하고 담백한 맛이 좋다. 팥의 고유한 단 맛이 이런 맛이구나. 남편은 먹어보더니 별 맛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두부가 너무 먹고 싶었어서, 저녁 된장국에 넣었다. 단백질은 소화가 힘들 수가 있으니 조금씩 먹으라고 한다. 단톡방을 보니 체하거나 위에 무리가 온 분들도 있었는데, 나는 아직 별 탈이 없어서 두부까지 싹싹 다 먹을 수 있었다. 


한 수저 한 수저가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음식의 맛을 느끼는 혀의 생생한 감각이 순식간에 뇌로 전달되고,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 듯하다. 찾아보니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 세로토닌은 뇌에서도 소량 분비되지만 주로 우리 몸의 장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이거구나! 자극적인 음식은 순간적인 쾌락에는 도움이 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자극을 찾게 되는 데 반해,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좋은 음식은 지속적인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었다. 행복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루틴을 잘 지키는데서 채워지는 마음이 아닐까. 


행복은 뭔가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가 아니라,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라고 한다. 바다에 높은 파도가 일면 그 파도가 내려가는 순간도 있지만, 잠잠한 호수는 완만한 곡선으로 일렁일 뿐, 높게 올라가지 않는다. 행복은 잠잠한 호수와 같다.


3년 전 새로운 삶을 설계하면서, 꾸준한 운동을 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루틴을 지키기로 나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던 이 루틴을 깨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삶이 된 듯하다. 이제는 떳떳하게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앞으로 일이 점점 늘어나더라도 이 약속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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