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다 고독사할까 봐요.”
TV 예능 프로그램인 ‘나는 SOLO’를 보던 중 한 남성 출연자의 신청 동기가 유난히 나의 마음에 남았다.
나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다 보면 언젠가 노숙자처럼 떠돌다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 막연한 두려움이 결혼을 결심하는 데 분명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지미(남편의 영어이름:넌 나의 짐이다)와의 결혼이 단지 고독사를 피하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마음 한쪽에 숨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오히려 ‘내가 당신 고독사를 막아준 거야!’하고 지미에게 큰소리치며 살고 있다. 나보다 연하라지만 이 사람도 분명히 나 없으면 외롭긴 마찬가지였을 거다.
며칠 전, 지미에게 조카 돌잔치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야, 다음 주에 조카 돌잔치 있잖아. 우리가 엄마 모시고 같이 가야 할 것 같아.”
그러자 지미가 말했다.
“응, 그런데 장모님 입고 가실 옷은 있어? 한 벌 사드려야 되는 거 아냐?”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얘, 오늘 왜 이러지?’
평소 같았으면 내가 뭘 좀 사자고 해도 ‘네 돈으로 사세요!’ 아니면 ‘당신, 돈 많네?’ 하며 얄밉게 비꼬던 사람이다.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순간 입꼬리를 눈가까지 끌어올려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응, 엄마 옷! 사드리면 좋아하시지. 오늘 시간이 되시는지 여쭤볼게.”
지미의 마음이 바뀔까 봐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는 굳이 약속을 잡고 직접 모시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당분간은 지미 비위 좀 맞춰줘야지. 하지만 그 결심은 삼 일을 못 갔다.
며칠 뒤, 나는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으러 갔다. 적성검사. 사실 별거 아니다. 2년 내 건강검진 결과지와 사진 한 장만 제출하면 끝이다. 그날도 수백 명이 몰려 인산인해였다. 벽에 기대어 번호표를 손에 쥐고 기둥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지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적성검사 갱신 기간 놓쳐서 벌금 내고 면허증 받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야.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자리도 없어”
나는 마치 대기실 기둥과 하나가 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박힌 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지미의 말은 이 기둥을 뽑아 입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적성검사 받는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어머님! 반납하고 요양원이나 예약하세요!”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낄낄대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20세기... 지금 제정신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태연히 할 수 있을까? 당장 전화기 너머로 내 다리를 지미의 얼굴에 휘둘러주고 싶었다.
운전면허는 갱신이라도 되지, 남편도 어디 가서 적성검사라도 받아봐야 한다.
저 성격은 갱신도 안 되고 폐기도 안되니 문제다. 분리수거도 불가!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
이런 사람을 옆에 두고 살아야 하다니 전생에 내가 나라라도 팔았나 보다. 이 업보 진짜 무겁다.
요즘 지미는 자꾸 나를 '노약자' 취급한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요양원 가세요.”
명상 음악을 틀면, “요양원 가세요?”
심지어 휴대폰 소리 좀 줄여달라고 해도 “요양원 가세요!”로 마무리한다.
이젠, ‘요양원 가세요’가 내겐 거의 욕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내가 복서라면 링 위에서 때려죽이고 싶지만 나는 작가라 글로 죽이고 싶은 충동이 다크서클 끝까지 밀어 오른다.
다섯 살 어린 저 자식!
입은 가볍고 배는 무겁고 눈치는 없고 돈도 없고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말만은 꼭 따박따박 받아친다.
“요양원 가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개그콘서트에서 튀어나온 개코원숭이 얼굴의 찌푸린 입꼬리와 번뜩이는 눈으로 비아냥을 날리며 내게 독설을 던졌다. 야비함이 얼굴에서 철철 넘쳤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냥 확! 아무도 모르게 저걸 죽일까’ 순간, 예전에 봤던 ‘마누라 죽이기’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땐 웃으며 봤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죽이고 싶었는지 이해가 된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계획만 수십 번은 세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선을 지키는 여자다.
속으로는 남편을 수백 번쯤 폐기하고도 남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갱신 중’이다. 아직은 말이다.
결혼도 일종의 운전면허라면, 나는 매일 갱신 중이다. 저 인간은 갱신은커녕 번호판만 달고 간신히 굴러다니는 폐차 수준이다. 브레이크는 고장 난 지 오래됐고 깜빡이는 애초에 달려 있지도 않은 모양이다. 차선 변경은 늘 예고 없이 불쑥불쑥 들어오고 내비게이션은 있으나 마나 목적지는커녕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을 기억하는 능력! 그 기능은 벌써 오래전에 고장 난 듯하다.
지미는 요즘 자꾸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깜빡하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남들이 두려워하는 독사였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버지는 한 번씩 호랑이가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갱신 중이다. 너도 이제 좀 갱생하자!
같은 이불을 덮고 자지만 가끔은 ‘동상이몽’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래 어쩐지 갱생된 거 같더라 역시 넌 지미였어! 내가 잠깐 널 잊을 뻔했어! 장모님 옷 챙기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요양원 드립으로 개그 욕심부리던 인간이라니!
잠깐 내가 널 착각할 뻔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남편 적성검사’를 보기로 했다. 항목은 다음과 같다.
남편 적성검사 항목
1. 아내 전화 잘 받기 (부재 중일 경우 반드시 회신)
2. 농담과 놀림 사이의 경계선 파악하기(경계선 밟는 순간 지뢰 폭발함)
3. 장인·장모님 성함과 생신 외우기 (내 생일도 포함)
4. 아내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기(대충 말고, 눈을 보고 말할 것)
5. 갱년기 증상 놀리지 않기 (특히 중요함)
6. “요양원”이라는 단어는 절대 입에 담지 말기(항상 욕으로 들림)
7. 아내의 말 중 ‘중요한 말’ 눈치채기(반복하게 말하지 않게 하기)
8. ‘고마워’라는 말 자주 하기(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피땀 흘리는데 알아주기)
9. 가사노동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인지하기
(음식물 쓰레기 일주일에 한 번은 버리기)
10. 내가 쉬고 싶을 땐 잠시 나가 있기(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음)
지난주 점수는 100점 만점에 0점!
예상했던 대로다. 그래야 지미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없었으면 고독사 했을 사람이다. 나도 지미가 없었으면 고독사했겠지만 지미가 있어 내가 지금은 독사(독기 바짝 오른 죽음) 할 지경이다.
갱신이 안 되는 사람에겐 가끔은 강제로라도 갱생의 기회를 줘야 한다. 가정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혼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사랑’보다 ‘생활’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떠오른다.
함께 사는 일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지금도 내 적성에 맞는 사람일까?
그와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그 옆에 내가 있는 것이 아직도 그에겐 기쁜 일일까?
그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확실하다.
나는 오늘도 운전대를 잡는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길 위를 굽이굽이 달린다.
‘다음 갱신일엔 그 인간은 갱생 가능할까?’
운전면허는 연장할 수 있어도 남편은 자동 갱신되면 안 된다.
내 인생이라는 도로 위에서,
그가 내 적성에 맞는 동승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적성에 맞는 사람으로 계속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