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그리 속에 피어난 난초

by 이송

“빵!”

자동차 경적 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나가 창문을 내리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언니, 뭐야! 푸하 레옹인 줄!”

두나가 그럴 만도 했다. 1년 가까이 어지럼증으로 집에서 뒹굴며 살찌는 데 몰두하다 보니 몸은 점점 풍성해졌고 출근할 때 말고는 외출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입을 만한 옷이 없어서 결국 꺼낸 건 체형을 아낌없이 감싸주는 펑퍼짐한 긴 트렌치코트다. 게다가 트렌치코트 품에는 난초 화분까지 소중히 안고 있었으니 선글라스만 썼다면 영화 ‘레옹’그 자체였을 거다.(레옹 설명: 1994년에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영화이다. 하루아침에 가족이 몰살당해 고아가 된 소녀 '마틸다'와 고독한 외톨이 살인청부업자 '레옹'의 복수극을 그렸다.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 그리고 유일한 친구는 난초 화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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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레옹복장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건설현장에 가는 길인데 첫 미팅에 음료수만 한 박스 들고 가긴 성의 없어 보였고 전날 몇 군데 꽃집을 돌고 돌아 고르고 또 고른 끝에 데려온 건 나비처럼 우아한 꽃잎을 가진 ‘호접난’ 화분이었다.(호접난: 서양란의 일종으로, 꽃 모양이 나비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나는 난초를 품에 안고 두나의 차 조수석에 앉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20년 넘게 건설현장의 가설사무실과 홍보관 설치에 관련된 일을 해오며 나는 언제나 운전석에 있었다. 조수석은 늘 가족이나 직원,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의 자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자리에 내가 앉았다. 두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현장으로 향했다.


작년 4월이었다. 처음 어지럼증이 시작됐을 땐 ‘극심한 다이어트 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도는 몸을 이끌고 병원을 몇 군데나 돌았지만 뚜렷한 원인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어지럼증은 더 심해져 더 세게 돌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때부터 내 몸과 세계는 빙빙 돌기만 했다.


일도 사람도, 그리고 내 일상이 통째로 멈춰버렸다. 겨우 출근은 하고 있었지만 20년 넘게 내가 해왔던 현장 일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 무렵 2년 전 시공했던 현장의 소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잘 지내시죠? 저희 현장 공사를 너무 깔끔하게 해 주셔서요. 신규 현장이 하나 생겼는데 소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 말에 나는 꾀꼬리처럼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감사하죠! 잘 마무리하고 제가 연락 드겠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과연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혼자 택시 타는 것도 벅찬 몸으로 현장 일을 다시 맡아도 될까? 불안감이 조금씩 올라왔다. 그래도 나는 몸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첫 미팅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미팅의 날이었다.


내가 건설 현장에 처음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앉는 게 아니다. 그 사무실부터 짓는 게 시작이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앉을 수 있는 자리조차 없는 곳이 부지기수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진입로를 바라는 건 나에겐 늘 사치였다.


이번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건 길게 늘어선 레미콘 타설을 준비하는 차량들이다. 사무실 진입로를 포장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두나와 내가 걸어 올라가야 할 길은 진흙과 자갈이 뒤섞인 바닥 위에 비닐까지 깔려 있어 매우 미끄럽고 울퉁불퉁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우리가 온 현장은 평지가 아닌 언덕 위다. 말이 언덕이지 거의 사람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급경사의 스키점프대 같았다.


문제는 내 품 안에 안긴 난초였다. 차마 이 난초 화분을 안고 급경사 진흙탕 길을 오르자니 언제 미끄러질지 몰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약 넘어지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품에 안은 난초를 진흙탕으로 놓아 버려야 했고, 난초를 살리기 위해선 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가 진흙탕 그레이 색으로 변해야 했다. 결국 나는 도로 옆 경계석 위에 난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두나와 함께 소장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대충 봐도, 지리산을 등반하는 수준인 듯했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신발 밑창은 진흙과 한 몸이 되어갔다.

“우린 지금 건설현장이 아니라 머드축제에 온 거야.”

두나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바로 ‘나의 현장’이고 이곳에서 시작되는 일상이 내겐 익숙하다.


그러다 마침내 언덕의 정상쯤에 다다랐을 즈음 사건이 벌어졌다. 진흙 위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던 나는 발목이 살짝 헛도는 느낌에 멈칫했고, 그 순간 소장님이 재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끌어주시는 건가 싶었는데, 느낌이 묘하게 반대였다.

‘잠깐! 이 묘한 기분은 뭐지? 지금 나! 끌려가는 게 아니라 소장님을 끌어당기고 있는 건 아니야?’

한쪽은 올라가려 하고, 한쪽은 내려오려 한다. 마치 과학 시간에 배웠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우리 둘 사이에 이상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조금만 더 끌어당긴다면, 내 무게를 손아귀에 조금만 더 실어버린다면 날 끌어주려던 소장님은 진흙탕을 굴러 저 아래로 굴러갈 것만 같았다.


나와 소장님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꾹 참았다. 결국 소장님은 나를 ‘끌어올리는 척’하며 힘겹게 균형을 유지했고, 나는 ‘끌려가는 척’ 혼신의 연기를 마친 후 임시컨테이너에 도착했다.


그렇게 종이 같은 소장님과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데, 레미콘 같은 사장님이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에는 살짝 놀란 기색이 스쳤고, 말투에는 어딘가 묘한 우쭐함이 배어 있었다.

“사장님이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이송이라고 합니다.”

나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전신을 한 번 훑더니 말했다.

“여자분이 하기엔 꽤 험한 일인데 직접 다 하시나요?”

그 말의 의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선명했다.

‘여자 혼자 이런 일을 한다고?’

아마도 진흙 언덕길에서 헉헉대며 올라오던 내 모습이 아직 눈앞에 선했나 보다. 나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험한 일이라뇨? 저에겐 거의 전원생활 같은 힐링인데요?”

그리고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제 소문 아직 못 들으셨나 봐요? 이 일, 제가 20년째 하고 있거든요. ‘여자’라서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앞으로 더 확실히 보여드릴게요.”


그 말에 사장님의 얼굴엔 놀라움과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진흙탕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나의 모습은 아마 그에게 그냥 ‘평범한 아줌마’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속은 비 오는 날 질척거리는 진흙길 위에서도 묵묵히 버티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하다.


현장을 내려와 경계석 위에 올려두었던 난초를 먼저 확인했다. 따가운 햇빛에 살짝 지친 듯했지만,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괜히 미안했다.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올라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이 난초는 내가 첫 미팅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감사의 꽃’이었다. 새로 지어질 사무실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은 마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레미콘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며 작업하는 현장 한복판에선 그 뜻깊은 선물조차 웬만한 ‘식물 테러’로 비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난초를 품에 안고 등장한 내 모습은 현장 기준으로 보자면 완전한 동상이몽!

‘여긴 시멘트 붓는 곳인데, 저분은 꽃 심으러 오신 듯’한 장면이었다.


작업자들 눈에는 “꽃집 아줌마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 역력했고, 현장 전체가 일순간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그날 진흙 언덕 위에서 난초를 든 트렌치코트의 여자는 유난히 튀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 인생도 그 난초와 다르지 않았다. 공그리처럼 차갑고 단단한 현실 위에서도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 주었고, 기다려 주었고,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내밀어 주었다.


선을 지키는 여자!

나는 몇 년 전부터 투잡을 하고 있다. 건설 현장 가설사무실을 짓는 일은 20년 넘게 해 왔다. 해외 생활이 힘들어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는 회사에도 다니고 있다. 이렇게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건 지금 직장동료들의 배려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더 성실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현장 미팅을 마친 뒤라도 집으로 퇴근하지 않고 성실히 내 직장으로 복귀한다. 휴가를 쓸 수도 있었지만, 오늘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두나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잊지 않았다.

“두나야, 잠깐만! 휴게소에 들렀다 가자. 사무실 갈 건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나는 호두과자 한 봉지를 들고, 아픈 나를 묵묵히 기다려준 이들이 있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고속도로는 호두과자죠!”

멋쩍은 말투에 과하게 웃으며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팀장님이 웃으며 물으셨다.

“일은 잘 보고 왔어요?”

나는 살짝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몸은 여전히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마음은 어느새 다시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아픈 시간조차도 결국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한번, 묵묵히 저를 기다려주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 글을 기다려준 독자님들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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