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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Apr 05. 2023

나무

비 내리는 식목일

나무의 어원은 '남', 즉 '날 생(生)'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생’의 의미가 이름 자체인 나무는 나고, 자라고, 솟아오르고 그렇게 살다가 다시 난 자리로 돌아가며 생명의 순환을 보여준다. 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면 온 생을 그 자리에서, 딱 그만큼의 자리를 잡아서 다른 나무들과 너무 가깝지도 않게, 멀지도 않게 그렇게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는 온전한 오롯함을 보여준다.


데일듯 뜨거운 한여름의 열기에서도, 모든 것의 순환이 멈춰 보이는 차가움 속에서도 나무는 버텨내고 살아낸다. 인고의 시간을 기념이라도 하듯 버텨낸 세월을 몸 안에 둥그런 선을 그려 기록을 쌓아 나간다. 다시금 따듯해지는 봄이 오면 짧지만 황홀한 어린 꽃들을 보여주고 이내 곧 포근한 푸르름을 돋아내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푸르름 역시 물러가야 할 때를 만나면, 붉은 정열의 인사로 나뭇가지에서 바람을 타고, 때로는 적막함을 타고 그렇게 다시 겨울로 회귀한다.


나는 특히나 겨울의 나무가 좋았다. 버티듯 살아가던 날들을 지날 때 마주한 앙상한 나무를 보면서 죽지 않고 살아내는 나무를 닮고 싶었다. 그 겨울나무를 보면 그저 괜찮다는 지금의 위로를 받곤 했다. 이른 봄의 나무도 좋았다. 죽은 듯 메말라 보였던 위태로운 가지 끝이 부풀어 오르면 그게 마치 희망의 인사 같았다. 곧 피어날 거라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그런 인사는 마른 겨울의 나무같이 느껴지던 내게도 여린 희망이 부풀어서, 뭔지 모를 것을 피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면 견디고 있다고, 버텨내고 있다고 그리 생각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고... 아무 의미 없이 그리 살았던 게 아니라는 묵묵한 위로는 미세하지만 내 안을 타고 흐르는 삶이라는 맥박과도 같은 진동을 전해 주었다.


나무는 그늘을 내어주고 부딪히는 잎사귀들로 바스락 거리는 바람의 소리를 들려준다. 눈부신 날 올려다본 나뭇잎 사이에서는 빛에도 가루가 있다는 걸 나무는 알려주었다. 나무는 내 한 몸 거뜬히 기대어 쉴 수 있는 거칠지만 우람한 등을 내어주었고, 어떤 날엔 단풍잎 편지를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말없는 고요함으로 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나무를 사랑했다. 나무는 내게 위로였다.


나무는 온몸으로 살으라고, 살아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무라는 이름처럼 오늘의 한 번의 웃음이, 어쩌면 자주 울어내었던 눈물도 나를 살게 하는 삶의 호흡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겪어내는 계절의 일부였을 거라고... 이 땅에서 나라는 나무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금 내가 '남'의 과정을 겪는 중이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리는 식목일이다.


나무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봄비가 내리는 나무들의 날답게 온 세상이 촉촉해져서 그들의 맥올림을 돕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라는 나무도 슬픔이라는 눈물로 자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귀하고 가치로운 것은 대부분 눈물 뒤에 찾아온 마음에서 났으니까. 그 마음이 나고 자라서 내가 좀 더 크고 굵어지고 단단해졌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모두 '남'의 과정을 겪는 이 땅의 나무 한그루로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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