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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Nov 02. 2023

아침동백

기다림의 황홀함

 한겨울에 피어날 붉은 동백을 기다리는 가을을 맞이하기란, 어쩐지 우아한 일인 것만 같다. 나무들이 잎을 털어내고 세상의 초록들이 잠시 사라지는 계절에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은 그 자체로 낭만이다. 나는 겨울에 피어날 빨간색 낭만을 소망했다.


 지난 3년간 키운 어린 동백나무는 단 한 번의 꽃도 피워내지 못하고 피실 피실 잎들을 몽땅 떨궈내더니 안녕을 고하고야 말았다. 꽃을 맺기 위해 추위가 필요한 줄도 모르던 나는, 동백을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책상 옆에 두고 키웠으니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백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나의 애정 어린 무지함으로 인해 피워내지 못한 동백꽃은 몇 송이나 되었을지,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작은 동백을 보내고 선뜻 다시 동백나무를 들여도 되는 것인지 겁이 났다.


 책상 옆을 지켜주던 초록의 작은 동백이 그리워서, 빨간 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리워서, 기대할 아름다움이 자리한 매일이 기다려져서 나는 다시 동백나무를 데려오고야 말았다.(이번에는 크고 제법 우람한 나무로!)


 차가운 바람을 피해 닫혀있는 베란다 창을 동백을 만나기 위해 아침마다 열게 된다. 아침에만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의 냄새와 맛을 동백은 내게 권해준다. 채 다 깨지도 않아 잠이 묻은 눈을 부비고 복슬복슬한 양말을 신은채 쪼그려 앉아 동백을 바라보며 오늘의 초록을 감상한다. 제주에서 보았던 카멜리아힐의 동백 군락과는 상반된 아파트 베란다에서 터를 잡은 동백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분무기가 내뿜는 공중에 산란하는 물방울 입자들은 긴 밤을 채웠던 갈증의 목마름을 가져간다.


 몽실한 꽃망울을 유심히 바라본다. 어제보다 통통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심록, 청록, 연두에 둘러싸여 있는 봉오리 표면의 하얀 솜털을 관찰한다. 붉은 얼굴은 아직인가 보다. 그래, 아직은 가을이니까, 기다려야 하겠지. 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달래 본다. 동이 트는 아침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작은 물방울들이 얹어진 동백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어쩐지 경이롭다. 물방울 위로 내려앉은 햇빛이 빛을 떨구고 튕겨나간다. 어느새 해가 떠오른다. 해가 떠오르는 건 금방이다.  동백 잎사귀 위에 앉은 빛무리도 찰나에 사라져 버린다.


 기다리는 일은 시간의 힘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일이다. 기다리는 것과 기다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감상을 제공한다.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것들, 기다려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찰나가 이어져서 만들어내는 순간과, 순간이 모인 시간들의 감상이 날아갈까 낚아채듯 옮겨 적는다.


동백의 빨간 꽃을 기다리는 황홀한 아침. 동백은 황홀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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