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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Feb 18. 2022

방 한쪽 모서리, 나의 숨구멍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책상이 갖고 싶었다. 언니가 안쓸 때 잠시 앉아보는 거 말고, 다른 사람이 쓰다가 버리기 전에 혹시 사용할 거냐고 엄마한테 물어봤을 때 받아온 그 책상 말고 진짜 내 책상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단칸방 생활을 했던 어린 시절에 비록 언니 책상이었지만 책상에 앉아서 수첩에 뭐라도 끄적이는 그 시간만큼은 그 작은 공간이 온통 내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종이 위 세상에서 나는 펜촉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곤 했다. 그때만큼은 걱정이랄 게 없었다. 나는 종이 위로 자주 피신을 갔다. 책상이라는 것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책상이라는 세상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어른이 된 나를 많이 상상하곤 했다. 한 서른 살쯤 되면 인생에서 최강무적쯤 되어있을 줄 알았었다. 그때는 그렇게 믿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빨리 자라기를 염원했었다. 그 나이를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 어린 시절이 더 최강무적이었던 것 같지만, 그 당시 바람들이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위로를 받곤 했다.




나는 누군가(남성으로 추정되는)로부터 물려받은 그 책상을 집을 떠날 때까지 사용했다. 얄밉게도 고장도 나지 않고 삐그덕 대지도 않았던 그 책상이 야속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멀쩡한 책상을 누가 괜히 버려서 내 책상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다니!! 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집을 떠나면 내 책상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첫 직장생활을 병원에서 제공해준 기숙사에서 시작했고 그곳에는 침대와 책상이 세트로 셋팅이 되어있었다. 병원 기숙사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는데, 이 책상도 그때 쓰던 건가 싶은 모양새의 특이하고도 낡은 책상이었다. 그 유물 같은 책상과 2년을 함께했다.


드디어 기숙사를 나와 방을 얻으니 원룸의 작은 공간에 읽고 쓰기만을 위한 전용 책상을 놓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고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책상+식탁+화장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다용도 테이블을 구매하였고 그 후로는 더 이상 학생도 아닌 내가 이제 와서 무슨 책상이냐 싶어서 단념하게 되었다.


엔틱한 디자인의 하얀색 콘솔형 책상이 나의 로망이었다. 정면에는 좋아하는 책을 가지런히 놓고 한쪽에는 공주풍의 스탠드를 켜고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일기를 적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상상하고 바랐던 그 책상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상다리의 모양과 그 위에 새겨진 문양 그리고 나무의 질감과 서랍의 손잡이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결혼을 하게 되고 혼수를 장만할 때도 나만의 책상을 가질 명분도 없거니와 작은 신혼집에 둘만의 살림살이를 채워 넣는 것도 비좁았다. 소녀시절부터 꿈꿔온 책상은 그렇게 아득해져 갔다.




인생의 바닥같이 느껴졌던 날이 있었다. 삶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너무 불행한 내 모습과 이제는 더 이상 뭘 어찌해봐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마음 놓고 엎드려 통곡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서 내가 마음 놓고 엎드려 울 수 있는 공간은 아무 데도 없었다.


겨우 화장대 의자에 앉아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때 내겐 상상속의 하얀색 책상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리웠다. 가져본 적도 없었으면서 마치 그 책상에 앉아서 울어본 것처럼, 그래서 괜찮아졌던 경험이 있는 것처럼 그 책상이 너무나 그리웠고 간절했다. 그날의 울음이 무척이나 외로웠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 밑바닥 같은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하고 싶었다. 그동안 자기 자신의 소리도 들어주지 않고 매몰차게 달리게만 했던 지난날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 온전히 무언가를 스스로 해줄 수 있다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하얀 그 예쁜 책상이 스쳤다.


드디어 나는 살면서 최초로 '내 책상'을 갖게 되었다.

 인생에 대한 셀프 사과의 선물로.



나는 지금 그 책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얀색은 아니다. 콘솔형은 맞다. 공주풍은 아니지만 엔틱 하긴 하다. 그리고 한쪽에는 스탠드가 있고 따듯한 차도 한잔 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곤 했던 그 책상은 실제로 나에게 위로와 위안의 장소가 되어주고 있다. 내방이 없는지라 아이의 놀이방 한쪽 모서리를 빌려 내 책상을 두고 매일 이곳을 찾는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이 자리도 내어줘야 하겠지만 아직 이곳은 나의 숨구멍이다.


이곳에 앉으면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스스로 나를 토닥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릴없이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책상 위에 놓은 싱그러운 '호야'의 잎사귀들을 감상하기도 한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좋아하는 만년필로 다이어리에 끄적이기도 하며 그렇게 나를 놓아주는 공간이다.


요 며칠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책상에 앉지 못해 숨이 턱턱 막히던 찰나에 아이를 재우고 슬금슬금 나와서 놀이방으로 향했다. 이 글 한편을 쓰는 동안 꽉 막혀있던 숨구멍이 슝슝 뚫리는 것만 같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에 미풍이 분다.


매일 사는 집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가 자신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내면의 소리를 들어주길 정말 잘했다. 정말 잘했다.


방 한쪽 모서리가 나를 살게 한다.

나를 숨 쉬게 한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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