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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Mar 31. 2022

쓰봉(쓰레기봉지) 트라우마

나는 쓰봉이 아프다

그림을 그렸다.


없는 그림 솜씨로 내가 그려낸 것은 울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와 그 아이 앞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봉투였다. 그 여자 아이와 커다란 쓰레기봉투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리게 한 주제는 '나의 유년기'였다.


4~8살 사이에 기억나는 유년시절의 한 장면을  그려보라는 말에 별 이유 없이 이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덤덤히 쓱쓱 그렸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날의 기억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대형 쓰레기봉투를 보면 그날의 어린아이가 되어 쓰봉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재연된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다거나 행복했던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나이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자주, 많이 다투었다. 내내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라 달리 피할 곳도 없었고 어린 나와 언니는 알아서 다른 곳을 찾아갈 방법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내내 그 싸움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어린것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상관없이, 엄마 아빠는 무참히 우리들을 잔인한 폭력에 노출시켰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기 전까지 내내 이러한 폭력의 관람이 지속되었지만, 자주 여러 번 보았다고 하여 덜 무섭고 덜 불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과제를 부여받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무참히 맞고 있는 엄마를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무력감도 함께 찾아왔다.






엄마가 어느 날 언니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엄마의 표정이 여느 때와는 달라 보였고, 그 이유를 사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그냥 묵묵히 엄마의 말을 들었다. 엄마는 이제 아빠와 헤어질 예정이며 우리들은 아빠와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8살이었던 나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였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엄마뿐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8살짜리가 보기에도 엄마의 삶은 너무나 불행해 보였다. 다른 동네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사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곤 했다. 아빠의 폭력으로 멍든 얼굴을 하고 동네에 장을 보러 다녀야 했으며, 한집 한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퍼지는 엄마의 비명소리를 통해 엄마는 이미 '맞고 사는 여자'로 각인되어있었다. 그런 엄마가 아빠를 떠나는 게 엄마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전기밥솥에 밥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쌀을 바로 씻어서 밥을 할 거면 손등의 절반까지만 물을 붓고, 쌀을 불려놨으면 손등의 절반보다는 물을 덜 부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내가 밥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신기해하고 재밌어하며 쌀이 담긴 밥솥에 손을 넣어 엄마에게 '여기까지만 물을 넣으면 정말 밥이 되는 거야?'라고 물었었다. 엄마는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엄마는 집을 떠나시기 전 이 어린것들이 굶을까 봐 걱정이 되셨나 보다. 그리고 실제로 엄마의 걱정대로, 우리는 스스로 밥을 해서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아빠는 우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지척에 살던 친척들도 우리를 나 몰라라 했고 그래서 우린 그렇게 약 2년간 방치되어있었다.




엄마가 밥 짓는 방법을 알려준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에 엄마가 언니와 나에게 말했다. 오늘 엄마는 떠날 거라고. 학교를 빨리 가야 하는데 엄마가 오늘 떠난다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떠나기 전날이라도 얘기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 떠나는 날 아침에 말을 하니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라는 이 말을 하고 학교에 가면 정말 이제는 집에 돌아와도 엄마가 없는 것인지, 이 인사가 정말 마지막으로 엄마와 나누는 인사인 건지 실감이 안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여전히 엄마가 집에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엄마가 우리들을 두고 진짜로 떠났을 리가 없을 거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내가 달릴 수 있는 최대한 힘을 다해 집으로 뛰어갔다. 내가 빨리 뛰어가면 아직 엄마가 안 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 생각뿐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없었다.


대신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엄마의 옷이 가득 담겨있었다. 키가 작아서였을까, 아니면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서 일까... 그때 내가 본 그 쓰레기봉투가 너무너무 커 보였었다. 엄마의 옷과 소지품이 쓰레기봉투에 담겨있는 것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로 엄마가 떠났다는 것을...


그때 문 앞에서 가방도 내려놓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날 밤 열병을 앓았다. 고열에 시달리고 온몸이 아팠고 나는 온종일 울었다. 나의 세상의 전부를 잃었던 날이었다. 8살에게는 너무 가혹한 이별이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이별을 고한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한다. 미리 말하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 칠 테고, 어렵사리 정한 엄마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엄마 역시 우리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걸 안다.



그날의 이 장면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엄마, 가지 마."



이 말이 너무나 하고 싶었다.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고 엄마가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충분히 알았지만 최근에서야 '엄마, 가지 마.'라는 말 뒤에 가려진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는 존재가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고 무력하게도 아픈 나이의 8살인 내가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슬픔과 동시에 분노도 느끼고 있었다.


엄마라는 그늘이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세상이 너무 무서웠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감히 말할 수가 없이 남들이 주는 대로, 돌봐주는 대로, 먹여주는 대로 군말 없이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왜 이리도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엄마가 떠났던 그날 나는 나 스스로 마음의 소리를 내는 문을 닫아버렸다.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엄마가 정말 가지 않았을까... 엄마가 갈 때 우리를 데려갔으면 어땠을까도 많이 생각했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방치되어 거의 거지꼴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다 못한 엄마가 다시 데려와 키우셨다. 그저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엄마는 한시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었고 엄마의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워주셨다. 엄마의 고된 삶을 보며 바르게 성장하려 노력하고 힘을 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너무 어렸던 8살의 어린 나는, 커다란 쓰레기봉투 앞에서 세상이 무너진 듯 울어대었던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너무나 괴롭고 아프다. 다시 돌아간다면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엄마를 붙잡지 못했을 것 같다. 다만... 엄마와 이별할 시간을 주었더라면... 받아들이 시간을 주었더라면 좀 덜 아팠으려나.


며칠 전 이불을 버리기 위해 구입한 대형 쓰레기봉투를 보면서 다시 8살의 나로 소환되었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는 나를 8살의 그때로 돌아가게 해 주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아직 좀 더 울고, 좀 더 풀어내야 하나 보다. 마음껏 울고 슬퍼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감정의 응어리를 뱉어내고 싶다. 감정을 담아 버리는 쓰레기봉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오늘은 이 글을 쓰면서 감정 종량제 봉투 하나쯤은 비워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쓰봉이 아프다. 특히 큰 사이즈 볼 때. 쓰봉은 나에게 트라우마 트리거다.


그날의 나를 꼬옥 안아주고 싶다. 많이 속상했을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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