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지켜낸 하루
2월 초.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했지만,
그날은 유독 더 추웠다.
기온은 한낮에도 영하 12도.
출동 조끼 안쪽까지 바람이 파고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헝클어졌고,
양 손가락 끝은 핫팩을 감싸도 얼얼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잠깐 기댄 그 순간.
출동 벨이 울렸다.
낯익은 화재 알림음이 아닌,
‘기이하게 무거운’ 구조 출동음.
벨 소리와 동시에 무전이 쏟아졌다.
“○○아파트 ○○○○호.
샷시 설치 중인 사다리차가 강풍에 의해 270도 회전,
건물 외벽 22층에 걸쳐진 상태입니다.
차량 전도 시, 인접 세대 다수에 피해 예상.
출동대는 지휘차, ○○펌프, 구조대…”
무전만으로도
현장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장비가 아니라 ‘건물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도착한 현장.
사다리차는 21층 거실창에 사다리 끝이 걸린 채
공중에 멈춰 있었다.
땅에 닿은 차체는
거센 바람에 따라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차체가 흔들리는 진동은 가까이 갈수록 더 뚜렷했다.
굵은 사다리 끝은 21층 거실 창에 수직에 가깝게 박혀 있었고,
창문 유리는 깨지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이미 그 세대는 ‘위험’ 그 자체였다.
우리는 사다리차 바퀴 쪽에 스태빌라이저를 보강 고정하고,
사다리 끝이 닿은 세대와 그 위층,
총 두 가구의 문을 두드렸다.
도어록 너머로 들리는 인기척,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열리는 문.
“괜찮으세요?”
입주민은 얼굴이 질려 있었다.
“... 소리도 안 났어요. 그냥, 창문 쪽에서 뭔가 눌리는 소리가….”
거실은 정적이었고,
창문 바깥엔 붉은 철골 구조물이 아찔하게 걸려 있었다.
구조대는 로프와 앵커를 이용해 사다리 끝을 창문 안쪽에 고정했다.
만약 아래서 차체가 무너져도
사다리 자체가 떨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조치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은 멈춰 있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오후 2시경, 사다리차 A/S 업체 직원이 도착했다.
헬멧을 쓴 사람이 다가와 사다리를 올려다봤다.
잠시 후, 말이 나왔다.
“내릴 수 없습니다.
와이어를 절단해서 강제로 하강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상태론… 크레인이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무전기를 쥔 손을 내려놨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이었다.
현장에 남을 것인가, 복귀할 것인가.
지휘대원 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사람 없잖아. 업체 작업인데…”
“아니, 지금 저 사다리차 무너지면
사람 없어도 큰 사고야.”
잠깐의 정적.
그리고 결론은 하나였다.
“남자.”
도로엔 이미 파이어라인을 쳐 두었고,
경찰도 통제선을 따라 배치됐다.
하지만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많아졌다.
핸드폰 카메라를 든 사람들,
“이게 뭐야…?”
“사다리가 저기까지 올라간다고?”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걱정했고,
누군가는 따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오후 5시.
첫 번째 크레인이 도착했다.
작업자는 사다리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프레임의 뒤틀림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270도 이상 틀어졌네요.
이 상태론 잘라봐야 안 내려갑니다.”
순간, 모두가 무표정해졌다.
침묵은 고요했지만
마음속에선 무언가가 느리게 부서지고 있었다.
“용접기 올려야겠네요.
사다리 프레임 자체를 잘라야 내려갑니다.”
또 다른 크레인,
산소용접기,
작업 가능한 사다리차,
모두가 필요했다.
우리는 기다렸다.
저녁 7시가 넘자 민원 항의가 빗발쳤다.
“이 앞 도로 언제 열립니까?”
“버스 못 지나간다고요.”
하지만 도로를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사다리차가 매달린 방향 아래에는
시민들이 오가는 인도와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혹시라도 기계가 전도되면
그 반경 안의 모든 것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경찰과 협조해
주변 도로와 보행자 통로,
정류장까지도 통제했던 것이다.
바람은 점점 더 매서워졌고,
고글과 넥워머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는
얼굴을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차가운 말들이
파이어라인을 넘어 들어왔다.
그 말은 경찰이 막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듣는 쪽이었다.
밤 9시.
작업 가능한 장비가 모두 도착했다.
그 순간, 사다리차 차주가 달려왔다.
“잠깐만요!
자르시면 안 됩니다.
이거 자르면…
저는 이제… 끝이에요.”
눈빛은 붉었고,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 사다리는 누군가의 전 재산이었고,
그 사람의 삶 자체였다.
사다리차 차주와 철거 작업팀,
그리고 사다리차 업체 관계자들이 모여 긴 협의를 시작했다.
우리의 역할은 단 하나.
그 논의가 어떤 결론에 이르든,
현장 전체의 안전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
결국,
두 대의 크레인이 번갈아 사다리를 지지하고,
작업자들이 한 단씩 프레임을 잘라
지상으로 강제로 하강시키기로 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줄을 고정하고,
작업자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바람 소리 사이로
긴장한 눈빛만 조용히 주고받았다.
사다리는 길었다.
65미터.
하강 속도는 1시간에 2미터 남짓.
차가운 쇳덩이를 다루는 그 작업은
공중에서 벌어지는 싸움 같았다.
손가락은 두 겹 장갑 안에서도 얼어붙었고,
작업자들의 입김은 줄 위에서 흰 연기처럼 퍼졌다.
우리는 줄을 잡으며 발끝을 굴렸다.
그건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흘렀다.
자정 무렵,
식당 화재 출동 지령이 떨어졌다.
“식당 화재. ○○고깃집 화로에서 연기 발생.”
그 말이 반가울 줄은 몰랐다.
히터가 나오는 차량 안은
어쩌면 오늘 처음으로 따뜻한 공간이었다.
심장이 온기를 느끼는 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현장은 고깃집.
숯불 화로에 남은 잿불이 배기구까지 번졌지만
다행히 조기에 진압했다.
그러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현장은 그대로였다.
사다리는 여전히 중력을 거슬러 있었고,
작업자들은 고개를 든 채 프레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핫팩을 나눠주며
그들의 어깨 위에 담요를 얹었다.
그러나 담요 아래,
등뼈는 이미 식은 금속처럼 굳어 있었고
발바닥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누구도 말은 없었다.
서로의 숨소리만, 가끔 허공을 흔들었다.
새벽 세 시.
사다리가 차량에 내려앉았다.
기계음이 멈췄고,
몸을 조이던 긴장이 툭 풀리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게 스며들었다.
우린 차례로 고개를 떨군 채,
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하루 종일 복귀하자던 대원이 조용히 말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네요.
우리만 괜히 고생한 것 같아요.”
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건
정말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추웠고,
너무 지쳤고,
너무 오래 서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곳을 비우지 않았기에
그 사다리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지켜낸 건
그날의 '아무 일 없음'이었다는 걸.
뉴스엔 나오지 않을 일.
사람들은 곧 잊을 일.
하지만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였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