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설명할 기회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말속에서 나는 정해져 있었다.
직접 함께 일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내 이야기가 오고 간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요즘은 그게 조금 더 날카롭게 박힌다.
—살다 보면, 이상하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인상'으로 살아질 때가 있다.
나는 이 조직 안에서 빠른 속도로 승진한 편이다.
또래들보다 두 계급이나 앞서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일 수도,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예전 감사부서에 있었던 이력도,
내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선입견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과정보다 결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다.
억울했다.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나를 모르는 이들이 누군가의 말만 듣고 내 사람됨을 단정 짓는다.
처음엔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명은 늘 반쯤 진 사람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그런 말들 때문에 누군가 내 앞에서 조심스러워질 때,
기껏 해온 일들이 왜곡된 채로 누군가의 입에 오를 때,
웃고 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그게 꽤 큰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 위축됐다.
그러다 속으로 터졌다.
이렇게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이 억울함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늘 관계 안에서 나를 증명해 왔던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젊었을 땐 친구 관계가 인생의 중요한 축이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나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들이 내 존재 가치를 말해준다고 믿었다.
—나를 향한 시선이 곧 내 가치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썼고,
섭섭하지 않으려, 또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 눈치를 봤다.
그 노력은 한때 따뜻한 연결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잃지 않기 위한 방어전'처럼 느껴졌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사람’, ‘괜찮은 동료’라는 말을 듣기 위해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도 웃으며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관계는 지키는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그렇게 관계에 나를 맞추며 살아온 시간들이
결국 내 안의 ‘나’를 흐리게 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내 평판은 곧 내 존재감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소모하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진짜 나를 잃기도 쉽다.
그러다 조금씩 혼자의 시간을 찾게 됐다.
(그런 면에서 브런치 스토리가 너무 고맙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오해받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함.
그 고요함이 불편한 날도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비로소 침묵이 나를 보호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시간.
혼자 있는 것이 늘 편한 건 아니다.
여전히 어색하고, 때론 두렵고 불안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누구에게나 잘 보이기 위해 나를 무리하게 맞추고 싶진 않다.
지금은 다만, 고요한 시간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제는 관계보다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은 시기일 뿐.
이제는 조금 달라지고 싶다.
혼자 있기를 즐기거나,
이해받지 못함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쉽진 않겠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외로움과 고요함을 구분할 줄 아는 어른.
나는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오늘도 천천히 연습 중이다.
—모두와 가까워지지 않아도, 나와는 가까워지고 싶어서.